내가 기르는 물고기 구피. 정확히 말해 주종목이 구피고 딸린 식구들로 생이새우, 체리새우, 네온테트라, 그리고 코리도라스가 있다.

아내가 미장원에서 종이컵에 얻어온 구피 네마리가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종이컵에 들어 있던 작은 멸치만한 이름 모를 물고기 구피 네 마리. 아내는 녀석들의 이름이 구피라 했다. 구피? 웬 개 이름? 그랬다. 나는 이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초등학생 실과 시간이었던가? 금붕어 기르는 방법 중에 물 갈아 주는 이야기만 기억이 났다. 수돗물을 받아서 며칠 묵힌 후 갈 것. 그렇지 않으면 수돗물이 가진 독성으로 물고기가 죽는다. (물고기를 죽이는 수돗물을 사람은 마시는 거다. 물론 끓여 마시는 것이 대세지만.)

나는 구두쇠다. 그래서, 물론 신기하고 이쁘기는 하지만, 이런 물고기들에게 돈을 들이기는 싫었다. 부엌에서 쓸만한 그릇이 없나 뒤적거렸다. 고추장 유리병이 눈에 들어 왔다. 깨끗이 씻었다. 하루 묵힌 수돗물을 붓고 종이컵보다는 많이 더 넓은 유리병으로 옮겼다.

어린 구피 녀석들은 그 유리병에서 석 달을 살았다. 애견가에 해당하는 애어가들이 보면 나를 아주 무식한 놈이라 부를 방법으로 물갈이를 했다. 작은 유리병 속에서 자라는 네 마리의 물고기. 이틀이면 물이 뿌옇게 되고 시큼한 비린내가 났다. 그때마다 나는 물을 싹 갈아 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런 완전 물갈이는 물고기들에게 대단한 스트레스라고 한다. 나는 그걸 몰랐다. 다만 맑은 물을 주고픈 욕심이었을 뿐.

그러던 어느날. 약 석 달쯤 지난 날이었을 것이다. 유리병 속에 뭔가 작고 까만 것이 휙 움직였다. 나는 순간 똥덩어리인줄 알았다. 물도 이미 많이 뿌옇게 되어 있었다. 물 갈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리병을 한번 확인하는데 길이는 쌀알만하고 굵기는 성냥개비 불탄 이후 재만한 것들이 물 속에 있었다. 새끼였다.

아니 언제 알을 낳았지? 궁금했다. 물 갈아준지 채 이틀. 그 사이에 알 낳고 부화되고 했나? 시간의 역추적이 급한 때가 아니었다. 일단 물이 너무 더러웠다. 새끼 여섯 마리는 숟가락으로 떠서 자그마한 컵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럴 때는 인터넷의 순기능이 참 마음에 든다. 검색어 구피. 많은 정보들. 이 녀석들이 새끼 낳는 물고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난태생. 뱃속에서 알이 부화되어 새끼 형태로 세상에 나오는 물고기. 살모사만 그런 줄 알았는데 물고기도 이런 종류가 있구나.

아이들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새끼를 낳은 어미들-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도 장하지만 새끼들의 존재 자체가 너무 감동스러웠다. 비록 미물이지만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새 생명.
그래서 어항을 샀다. 나는 그전까지는 남의 집이나 건물에서 어항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뽀글거리는 기포가 단지 공기를 공급하는 목적 하나만을 가진 것인줄 알았다. 공부를 하고 보니 아니었다. 공기 공급도 되지만 동시에 다른 여과기를 가동하는 역할도 한단다. 여과기 가동 원리도 공부했다. 공기가 아닌 전기의 힘으로 가동되는 여과기도 많았다.

어항은 금방 두 개가 되었다.

그리고 바닥의 사료 찌꺼기를 먹는다는 코리도라스도 사고, 충동구매로 네온테트라도 사고, 체리새우나 생이새우는 나름 그 역할에 대해 공부를 한 다음에 샀다.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어항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이 때문에 운동 시간이 줄어든 단점은 있지만 그냥 바라보는 자체가 즐겁다. 아내나 아이들 눈치가 보여 오히려 자제를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왜 그럴까?

나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기르는 것을 많이 바랬다. 어려서 살던 집 뒷마당에 돌고래가 사는 수족관을 꿈꾸기도 하고 사자도 꿈꾸었다. 동물의 왕국을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 아니면 내 본성 어디에 그런 동경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와중에 가정을 꾸민 이후 개도 길러 봤지만 개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두 번을 실패했다.

그러다가 이 물고기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어항을 들여다 본다. 물이 아주 맑다. 나름 나의 상식과 인터넷 정보를 결합해서 여과력도 높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맑은 물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물고기들이 건강하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새우들은 걸핏하면 죽어 나가는 것이 속상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새끼새우들도 눈에 간혹 띈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내 통제 하에서 어떤 생태계가 돌아간다는데 대한 만족감일까? 아니면 그냥 사랑일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하곤 하던데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랑이라기 보다는 통제 또는 지배에 대한 포만감 쪽이 더 큰 것 같다.

물론 개와 물고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개의 감정 표현이 훨씬 더 풍부할테니 말이다.
물론 물고기를 통제 대상 하나로만 보지는 않는다. 물고기가 새끼 낳으면 엄청 기쁘고 죽을 때면 속이 상하다.

물고기 기르기. 소위 물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물생활이 언제까지 갈런지는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몇 미터 길이의 어항을 집에다 설치하고 싶지만 공간도 여력도 자금도 없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두 개의 어항으로 계속 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겨워지는 순간이 올까? 나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밥주고, 출근 전에 잠시 또 멍하니 들여다보고 이런 일상의 반복이 재미있고 행복하다.

물고기에게 감사 표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더듬어 본다. 

나는 엄마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조상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더 많이 되감아지면 쥐를 거쳐물고기가 되고 나는 다시 작고 미약한 단세포 동물이 될 것이다.

단세포 동물은 걸쭉한 분자의 죽이 된다. 

지구는 물이 그득한 바위 덩어리다.

지구는 먼지가 뭉쳐서 만들어진다.

지구를 만든 먼지는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뿜어져 나온다.

별은 그 중심부의 힘으로 점점 더 무거운 원자를 만들어낸다.

별이 만들어지기 전에 빛이 있었다.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퍼져 나간 먼지 구름은 수백 광년에 걸쳐 흘러다니다 또다른 살아 있는 별들의 중력과 먼지 구름 자체의 전자기적 상호작용을 통해 어느 장소에서 다시 뭉친다.

다시 뭉친 별의 잔해는 또다른 별이 되고, 별이 되지 않은 다른 잔해는 행성이 된다.

그 행성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금 내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모여 나라는 영혼을 담고 다니는 그릇 노릇을 한다.

내 육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렇게 상상이라도 되지만, 내 영혼이 어디서 왔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내 영혼이나 자아는 컴퓨터 운영 시스템이나 그 위에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자아는 DNA가 가진 강한 생존 본능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 강하게 믿고자 한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에는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없는 우주는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는 우주가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누군가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내 주위에는 아직 없다.

누군가 알았을지 모르는 사람이 남긴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름과 더불어 공허해져가고 있다. 

바다를 본 사람이 아무리 바다 이야기를 해줘도 산의 사람들은 그나마 호수라도 이해하면 다행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고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물고기 이야기에서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저는 개를 두 번 길렀었고 두 번 다 실패했습니다. 개와 저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애완용으로서도, 식품으로서도..

 

저는 복날이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릅니다. 초복, 중복, 말복 세 개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양력인지 음력인지조차 모릅니다.

복날이 다가오니 어느 국제 동물애호가 단체에서 한국 보신탕 문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고 기사가 나오네요.

 

식품으로서의 개.

저는 보신탕을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시도해봤습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부서 사람들이 죄다 보신탕을 좋아하더군요.

당시 저는 신입사원이었던지라 대놓고 개 못 먹는다고 하기는 싫고, 의욕에 넘쳐서 같이 먹었더랬습니다. 생전 처음 먹은 개고기 요리는 육개장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집에서 한번 정도 더 먹었던 것 같고,

나중에 사천 살 때 굉장히 큰 보신탕 집에서 수육처럼 된 것을 한 입 먹어본게 마지막이군요.

 

제가 개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도, 그렇다고 개를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개고기 자체가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뭐랄까.. 개고기라는 말만 들으면 개가 풍기는 개비린내가 먼저 생각나서일 겁니다.

사실, 요리로서의 개를 먹어본 기억에 그런 개비린내는 없었습니다만, 사람의 선입견이라는게 무섭잖아요.

 

제가 그냥 개고기를 싫어할 뿐이지, 개고기 드시는 분들께는 아무런 호불호 감정이 없습니다.

 

아주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개 잡는 광경도 봤고, 돼지 잡는 모습도 봤습니다.

개를 나무인가 전봇대에 매달아놓고 줘패고 불에 그슬리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 끔찍하다기보다 그냥 아주 시끄러운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돼지 네 다리를 꽁꽁 묶어 자빠뜨린 뒤 목에 칼로 구멍 내서 잡는 모습에서도 불쌍하다거나 잔인하다는 기억보다는 돼지가 굉장히 시끄럽게 죽는다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측은지심에 앞서 시끄럽다는 기억이 남아있을 테고요..

지금은 아마 개나 돼지를 잡는 광경을.. 아무리 신사적(?)으로 잡는다 한들.. 직접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어릴 때의 나보다 더 순수해졌다는 것은 아닐텐데..

측은지심을 가진다는 것도 결국은 세상으로부터의 때가 묻는다는 한 현상인지.. 헷갈리네요.. ^^

 

이 세상의 동물 새끼 중에 사람 다음으로 이쁜 것이 개일 것입니다. 대체로요..

(물고기 새끼도 무지 이쁩니다.. 직접 키우는 입장에서는요..^^)

 

저희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옆집에 개 키우는데 그 집에 놀러가마 강아지가 내한테 자꾸 안긴다."

"강아지 눈을 들여다보마 이런 이쁜 눈을 한 거를 우째 사람들이 잡아먹노 그런 생각이 든다카이."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새 개 먹는 거 그거 다 모르고 하는 짓이다."

"내 어릴 때 (아버지는 해방 때 이미 고교 졸업생이셨으니 연세 많으십니다.) 기억해보마,

 키울 개하고 먹는 개는 종류가 달랐다. 먹는 거로 키우던 개는 지금 안 보인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지금 삽사리라고 주장되는 그 털 긴 개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지금 길러지는, 특히 시골 지역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사견처럼 생긴 개는, 일제 당시 우리네가 그렇게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도 길에 그 개가 버려져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통용되는 보신탕은 당연히 보신탕으로서의 효과가 전혀 없을 거라 보시는 겁니다.

 

참고로, 저희 아버지 현역 한의사이십니다. 참고들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사천살 때 뒷산 너머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본 개들은 죄다 도사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긴 자체가 아주 불쌍한 개들이었어요. 아니면 보신탕용으로서의 생을 아는 것인지.. 여하튼 표정들이 불쌍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보양 효과 없는 개들이 분명하지요.

 

도시 지역의 경우, TV로만 본 것입니다만 각종 개들이 다 있더군요.

심지어.. 애완용 강아지들까지..

여기도 분명히 그 옛날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없는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의 보신탕은 단지 심리적 만족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야 뭐.. 식품학자도 의사도 아닙니다만.. 아버지 기억에 따르자면 지금 시대는 젖소를 한우로 알고 먹는 정도랄까요.

 

젓소를 먹든, 한우를 먹든, 돼지를 먹든.. 이런 연장 선상에서 보신탕 문화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애완용 돼지도 있지만, 상당수 돼지는 식용이듯이,

애완용 개가 다음날 보신탕 상가에 등장한다해서.. 그것이 그렇게나 기를 쓰고 반대하고 데모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도둑 맞은 주인이 펄펄 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물고기 기르지만 동시에 그 살아있는 물고기 옆에서 고등어나 심치 잘 먹습니다.

 

동물은 그냥 동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육식을 장려하거나, 개고기만 특별히 많이 먹자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고기 먹는 사람을 무슨 야만인 보듯 하지는 말자는 거지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걸음걸음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곤충들이 죽어가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거기에 별로 거리낌이 없다면 개고기 문화도 그냥 하나의 문화로 보면 됩니다.

 

개고기를 반대하시는 분들이 순수 채식주의자고 육식문화 자체를 반대하는 거라면 저는 일단 고개는 끄덕거릴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있는 행동방식이고 주장이니까요.

 

그래도 한번 더 토를 달자면, 최소한 식물은 먹어야 인간이 사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고,

식물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순환합니다. 먹이 사슬이라는 다소 냉랭한 말로 이 세상은 하나의 고리를 이룹니다.

 

사람의 식습관은 그냥 지역별 문화로 보면 좋겠습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유명한 배우가 한 말이 기억난다. 출연료와 관련한 인터뷰였는데 거기서 그가 말하길, ‘그 정도 출연료로는 기본 품위유지가 안 된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품위 유지비.

 

광고에도 품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당신의 품위를 위해 …’ 류의 표현. 어느 배우가 말한 품위, 그리고 광고에서 말하는 품위는 결국 돈과 직결된다.

 

품위는 돈의 많고 적음과 상관이 있는 것일까?

 

국어 사전에서 살펴본 품위에는 대략 다음의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직품과 직위를 같이 부르는 말. 요즘 쓰이는 뜻은 아니다.

둘째, 사람이 가져야 할 위엄이나 기품.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이다.

셋째, 사물이 가지는 고상한 인상. 이것도 이 글의 주제와 비슷하다.

넷째, 귀금속이 함유하는 가치. 이것은 이 글에서 잘못된 품위의 예로 거론될 것이다.

 

우리말 품위에 해당하는 영어는 elegance grace를 들 수 있다. 무릇, 추상적 표현을 나타내는 단어는 여러 함의를 포함한다. 방금 봤듯이 품위라는 한 단어에도 여러 뜻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어 단어도 추상적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여러 함의를 포함하며 그로 인해 품위 = grace’라는 단순한 등식에서 벗어나는 뜻으로 번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grace는 신의 은총을 뜻할 때도 사용된다. 우리말에서 신의 품위라는 표현은 없다.

어쨌든, 품위와 비슷한 뜻을 골라내서 정리하자면 elegance grace의 품위에 해당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존중을 자아낼 수 있는 행동이나 성품의 절제된 매력 또는 정중함

둘째, 매력적으로 잘 고안된 사물

셋째, 절제된 현명함. 이거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결국 우리말이나 영어나 품위에 해당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정신적 품위와 물질적 품위. 따라서 어느 배우의 품위 유지비는 비록 내 귀에는 거슬리지만 말은 된다. 광고에서 그렇게나 소비자 지갑 털려고 애쓰며 남발하는 품위라는 단어도 내 귀에는 거슬리지만 언어를 더럽힌다고 매도할 수는 없는 정확한 용법의 결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도 영어도 이 품위라는 단어가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은 이 인간 세상이 아직도 불완전하고 덜 떨어진 것임을 반증한다. 외형의 화려함과 내면의 깊이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의 행적을 빼놓고 외모만을 보면 그녀는 결코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다.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그 쪼글쪼글한 외모 어찌 보면 초라할 수도 있는 물리적 외모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품위가 높다는 말은 이럴 때만 써야 한다.

 

성철 스님의 일생을 빼놓고 외모만을 보면 스님답지 않게 살이 많이 오른 괴팍한 중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이 결코 그의 외모와 분리될 수 없고 그 모든 것을 놓고 보면 그는 참으로 거대한 장부요 스승이다. 품위가 높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외모 하나만 보자면 결코 미남의 범주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그의 일생을 같이 보면 그는 정말이지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미남이요 품격 높은 사람이다.

 

외모가 화려한 것. 물론 좋다. 못 생긴 것 보다야 기왕이면 잘 생긴 것이 좋다. 하지만 내면의 품위가 외모를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굉장한 불균형과 반전을 보게 된다. 외모와 내면의 조합을 선호도 순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선호도는 내 주관에 따른 것이다.

첫째, 내면도 아름답고 외모도 아름다운 사람. 오드리 햅번을 떠올리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둘째, 내면은 아름답고 외모는 약간 부족한 사람. 앞서 이미 예를 든 바 있다.

셋째, 내면은 별로지만 외모는 아름다운 사람. 유명 인사들 중에 이런 예가 흔히 있다.

넷째, 내면도 별로면서 외모도 별로인 사람. 얘 이름 말하면 요새는 잡아 간다. 독재이므로 함구.

 

가끔 보면 셋째 부류를 보면서 품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 경우는 그런 말하는 사람들까지 덤터기로 저렴하게 분류할 수밖에 없다. 비싼 치장과 그럴싸한 외모가 사전적 정의로는 품위에 해당할지 몰라도, 동물과는 달리 우리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정의에서는 당연히 품위의 범주에 들 수 없다. 그럴싸한 외모는 가지면 좋은 것정도이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이라 자칭하는, 실제로는 쓰레기만도 못한 수구 언론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주 구사했던 비난은 대통령으로서의 품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걔들이 아닌 개들이란 표현을 쓰겠다. 개들이 바라는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는 한 손에는 떡, 다른 손에는 칼을 든 모습이다. 개들은 그게 바로 대통령 내지 권력자의 품위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 품위를 갖추었고 진짜 품위 있는 권력 아니 권리를 구사한 분이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권력과 권리의 차이도 한번 논해보고 싶다.

수구언론 개들은 나 같은 사람 안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일 내가 노무현 대통령 정도 되는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결코 한 손에는 사람, 다른 손에는 민주를 들고 내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 나는 수구 개들이 바라는 식의 품위를 넘어,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채찍을 들고 개들을 다루었을 것이다.

개들은 아직 모른다. 개들이 만났던 사람이 진짜 품위 있는 사람이었음을. 그러니까 걔들이 아니라 개들이라 부르는 거다.

 

테레사 수녀는 희생과 봉사를 통해 품위를 갖추었다.

성철 스님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도 과정을 통해 품위를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존 대통령들이 구사했던 권력을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의 권리 범위로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품위를 이루었다. , 그에 앞서 적어도 내게 있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 보다는 마누라가 더 소중하다는 그 호랑이 같은 목소리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품위 있고 용기 있는 분이 되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할 수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성철 스님이나 테레사 수녀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관 측면에서 다른 것이 있다 하여, 이런 분들의 품위를 못 알아 본다면 그 때는 그 못 알아 보는 지적 수준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공부 더 해야 한다.

 

품위가 높은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확고한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의 수준에 이를 정도의 확고한 가치관이 있으면서 마찬가지로 그 가치관을 끊임없이 다듬는다는 것이다. 확고함과 다듬음이 모순된다고? 다이아몬드 원석은 아주 단단하다. 하지만 다듬음으로써 화려한 보석이 되는 것 아닌가?

 

석달쯤 전일까? 아내가 미장원에 갔다가 작은 멸치만한 물고기 네 마리를 종이컵에 얻어 왔다. 물고기 종류 이름이 구피라고 한다.

개도 키워봤고, 거북이도 키워봤고, 병아리도 키워봤는데, 우리 집에서 물고기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다. 아이들도 좋아한다.

 

어느 날, 구피 한 마리가 매우 비실거렸다. 그때까지 물고기를 기르는 것은 내 몫이었다. 밥도 주고 2~3일에 한번씩 물도 갈아주고. 게으른 내가 물고기 당번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물 갈아줄 때 물고기 꼬물거리는 것을 아내도 아이들도 징그러워하기 때문이다.

개가 귀엽지만 개똥은 더럽듯이, 물고기 보는 재미와 물고기 만지는 느낌은 다른 것이니까.

 

아픈 물고기 한 마리를 두고 다른 세 마리가 마치 뜯어 먹듯이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놀랬다. 아무리 미물이라 하나, 동료 의식에 대한 기대에 앞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생물이 단지 아프단 이류로 저렇게 뜯어 먹다니! 내가 밥도 충분히 줌에도 불구하고.

아픈 녀석의 너덜너덜해진 지느러미를 봤을 때 다른 놈들이 뜯어먹는 수준의 공격을 한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격리 조치.

하지만 격리된 아픈 녀석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난 그 때 다른 녀석들을 변기에 쏟아 버리고픈 충동을 느꼈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남은 세 마리는 아주 생생하게 지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경복궁 나들이를 다녀 왔다. 일요일 저녁의 나른하고 안락한 시간.

지난 금요일에 물을 갈아 주었는데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물이 또 뿌옇다. 물을 갈아줄까 싶어 작은 어항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랬다.

새끼다! 여보, 얘들아~”

 

난 첨에 물 속에 물고기 똥이 떠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좁쌀보다 더 작아 보이지만 물고기 새끼 몇 마리가 분명히 헤엄치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물을 갈아 주었는데, 그 직후 알을 낳았다 쳐도 세상에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새끼가 나오나? 구피는 새끼를 바로 낳는 종인가? 궁금함이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구피는 난태생 즉, 물고기지만 어미 뱃속에서 알을 깬 후에 새끼의 모습으로 나온다고 한다. 아하~.

 

똥하고 새끼가 비슷한 크기로 둥둥 떠다녀서 구분이 어려웠지만 잘 살펴보니 이미 죽은 녀석이 하나, 그리고 여섯은 잘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큰 녀석들의 모양새가 이상하다. 새끼를 쫓아다니면서 먹으려는 모습이다. 이런 미물들이라 생각하며 새끼들을 숟가락으로 떠서 격리시켰다.

 

격리한지 하루 만에 또 한 마리가 죽었고, 이틀이 지난 지금 다섯 마리의 새끼들은 안전한 종이컵 속에서 잘 헤엄치고 있다.

 

비록 미물이지만, 우리 집에서 애완 동물을 키워 새끼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쁘기도 하고 가슴이 약간 시리기도 하다.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저렇게 갇힌 생명이라는 것. 아주 안전할지는 몰라도 갇혀서 길러진다는 것. 이런 생각들이 든다.


원본 출처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79302
이글 썼던 시점 = 2008년 4월16일.
이글 옮긴 시점 = 2009년 6월 5일. 안타까운 마음이 여전히 나를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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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라기보다 사실 하나.

이 땅에 보수는 없다. 보수라 자칭하는 수구가 득시글거릴 뿐.

사실 수구라는 용어도 아깝다. 수구라기보다 매국노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일단 꾹 참고 수구라는 용어를 써주자.

수구는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현대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수구는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진보의 탈도 쓴다. 수구는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그나마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가치관을 확 바꿔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영달을 위해 명예도 내동댕이치는 모습을 이번 총선에서도 보여주었다.

수구는 생존본능이 매우 강하다. 즉, 수구는 유연성이 매우 강하다. 즉, 수구는 이익을 위해 그 나름의 대의를 희생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줄 안다. 똑똑해서라기보다 욕망이 워낙 강렬해서 그렇다. 양심 가진 사람은 함부로 못하는 짓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존 능력 그리고 나아가 강한 출세욕을 본받고 싶기까지 하다.

한편, 자칭 진보라 하는 사람들도 수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개혁에 성공할 수도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지난 5년, 그들은 수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들에 태클을 넘어 보디체크해댔다.

단, 진보가 수구와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수구는 개인의 영달 또는 이익을 위해 발목을 걸지만, 진보는 대의가 아닌 소의에 집착하느라 발목을 건 것이다.

진보의 눈으로 보기에 FTA나 해외 파병은 분명 반대 사안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 자신도 이 두 개 정책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소의 두 가지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등에 칼 꽂는 짓은 안 했다. 하지만, 진보는 칼을 꽂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무늬만 진보라 부르거나 멍청한 진보라 놀린다.

FTA는 분명히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까운 정책이다. 해외 파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몇 개 사안에 대해 나와 견해가 다르다 해서 나는 섣불리 노무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나는 그의 대의를 느꼈고 나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의는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1%가 쥐락펴락하는 이상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국회로 대변되는 대의민주주의도 아니고 민중 전체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민중이라는 용어가 나와서 말인데, 진보의 치명적인 실수는 1%를 민중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민중에는 그 1%도 다 포함되는 것이다. 이건희 씨도 한 표고 나도 한 표다. 민중민주주의에서는 이건희 씨의 한 표가 나의 한 표보다 그다지 더러울 것도 없고, 그다지 초월적일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 주위 일부 1% 지인들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완전 적군으로 규정하고 이를 갈더라만, 내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1%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양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준법을 요구했을 뿐이다. 불법과 탈법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준법을 요구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1%들 그리고 그들의 개들인 조중동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좌파니 뭐니 이상한 딱지를 붙이고는 적군으로 규정해버렸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정작 보수적 정치인인데도 말이다.

수구는 개인의 영달을 민중의 이익으로 사탕발림하는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 이 역시 나는 개인적으로는 배우고 싶다. 고려시대 신돈이 울고 갈 재주다.

하지만, 진보는 소의에 집착하느라 대의를 보지 못하고, 그나마 정작 자신들의 편이어야 할 최소 50% 가까운 민중들의 소중한 표를 전혀 흡수하지 못한다.

진보는 소위 말해 적전 분열을 잘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진보의 한계다. 나의 학창 시절, 주위 운동권 친구들이 보여주던 그 치열한(?) 논쟁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목표는 독재타도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의 실현일진데, 왜 뜬금없이 주사파니 아니니 이런 걸 가지고 서로 싸우고 치고받고 분열되고….

열린우리당이 해온 행적들을 보라. 지난 몇 년 민노당이 해온 행적들을 보라. 그들은 대의가 무엇인지는 까맣게 잊고 그저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딴나라당 못지않을 폐해를 우리에게 끼쳐 버렸다.

지나간 버스에 손 흔드는 셈이지만,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합당이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정략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뭉쳤어야 했다. 오직 1% 수구를 위해 살아가는 딴나라와 조중동을 1차 박멸 대상으로 삼고 이 두 개 암세포를 제거한 후에 그들은 각각 보수와 진보로 갈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의가 아니라 소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것에 부연을 달아야겠다. 나는 딴나라 관련자 개개인, 조중동 종업원 개개인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각 개인은 엄연히 우리와 같은 민중이다. 생각이 해괴망측해서 그렇지, 엄연히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집단으로 있는 한, 그 집단 자체는 반드시 박멸의 대상이어야 한다. 왜냐? 애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집단이니 유가 아닌 무로 되돌려야 한다는 뜻에서다.

이 단순한 목표와 대의를 왜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의원 나리들은 몰랐을까? 민노당의 오묘한 정신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음알음 들어본바 열린우리당의 정신세계는 단순했다. 그들에게는 다음번 금배지가 대의보다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다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수구라 불려 마땅하다.

이번 버스는 우리가 놓쳤다. 나 자신 경상도 출신이지만 내 고향 욕해봐야 별 소득도 없다. 친구들만 떨어져 나갈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현직에서 물러났다. 내 욕심으로야 그분이 다시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지만, 설사 그분의 개인적 뜻이 이제는 은퇴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 한들 그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그는 그만의 세계와 삶이 있기 때문이다.

수구들은 절대로 적전 분열을 하지 않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진보는 지금까지 으레 그랬듯이 앞으로도 또 적전분열을 할 것처럼 불안 불안해 보인다.

진보의 가치를 다시 가슴 속에 새겼으면 좋겠다. 진보란 대의를 완성하는 길로 가는 그 자체에 뜻을 두어야지,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 생각하거나 엉뚱한 소의에 집착하면 그건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떡고물에 집착한다면 진보의 탈을 쓴 수구고, 소의에 집착하면 멍청한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수구의 개밥그릇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진보의 사탕적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민중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해봐야 대다수 민중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수구의 개밥그릇에 해당할 진보의 사탕을 찾아내는 것이 진보의 대의를 완성하는 첫 번째 전술이 될 것이다.

나는 답이 없다. --;


사족) 조중동 신문기사 좀 퍼오지 말기를. 개를 키워보면 안다. 개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주인의 미움이 아니라 주인의 무관심이다. 주인이 개를 미워할 경우 적어도 밥은 준다. 하지만, 개에게 무관심해지면 결국 개는 굶어 죽는다. 조중동은 쳐다보지도 말자.


많이들 받아 가세요.
저도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저는 참 게을러요. 당신을 좋아한다 말만 하면서,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출장 때문에,
탄핵 사태 때는 첫날 딱 한 번만 촛불을 그것도 30분 남짓, 그리고는 또 일 핑계,
인터넷 글쓰기는 귀찮아서 그냥 흐지부지,
당신이 퇴임하신 뒤에는 봉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구름처럼 잔뜩 그리고 휴일이면 방에서 뒹굴,

그러다 .. 결국 당신은 너무 일찍 떠나 버리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살아서도 날 울리더니, 가시면서도 또 울리네요.

29일 장례식 때는 반드시 참석하리라 생각했는데, 또 출장.
그런데 마침 출장지가 창원이더군요.
이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인가요?

후배와 함께 차를 몰고,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나날을 보낸 그 마을을 해가 지기 전에 밝은 빛으로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것은 또 허락치 않으셨네요.
날이 다 지고, 어둠으로 산자락을 겨우 파악할 지경이 되어서야 당신이 사랑한 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몰지각한 사람들 말고,
우리 노빠들은 이미 머리로는 다 아는 사실을 하나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정말 깡촌 출신이더군요. 내 고향도 깡촌. 그래서 더 잘 이해합니다.
전형적인 시골.
당신께서는 그 고향을 사랑하셨죠. 그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세상이라는 것.
당신은 사람 사는 세상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지만,
세상에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당신께서 이번에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대단하더군요.
평소 그렇게 짜증 잘 내는 우리네가 말입니다.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거의 짜증내지 않더군요.
물론 애들은 짜증을 냈어요. 당연할 수밖에요.
아이들은 노무현이라는 당신을 아직 잘 모를 수밖에요.
간간이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투정은 오히려 이쁘더라고요.
물론 내 아이가 그랬다면 나는 혼냈겠습니다만.. 부끄럽네요.
(좀 더 너그러운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그 날, 두 발로 나가셨던 마을을, 작은 상자에 누운 채로 들어오시던 그 장면을 뉴스로 봤습니다.
따님이시죠. 뭐 같은 언론에 그렇게 시달리던 그 따님.
뉴스라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아버지, 아버지'를 되뇌이며 울더군요.
나도 두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슬펐습니다.

자식들이 그렇게 아파할 것을 당연히 아실 것이면서도, 그렇게 떠나야 했던 그 외로움 속의 당신이 생각나서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어렴풋이 기억할 거에요.
자기 자식들에게 말하겠죠. '나도 임마, 그 분 가시는 길에 조문을 갔었단 말이야.' 자랑할 겁니다.
사실 잘 모르면서 말이죠. 지금은 귀엽죠. 나중엔 어른이 될 테고.

난 그 아이들보다 말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걸었던 그 길, 당신이 추구했던 그 가치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만,..

솔직히 그건 좀 이른 것 같습니다. 호기심에 와본 듯한 사람들도 좀 보이더라고요.
난 속좁은 남자라 그런 모습이 좀 눈꼴 시기도 했습니다만,
노무현님, 당신께서는 그 남자다움으로 그런 호기심 어린 방문객들도 웃으며 맞으셨을 거라 확신합니다.

여러 날을 쪼개서 울어 그런지,
아니면 와본다 와본다 하면서 결국 당신이 떠난 이후에 당신의 마지막 발자욱이 머물렀던 곳을 따라 걸어 그런지,
오히려 눈물은 나지 않더군요.

그 긴 줄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을 회관 어드메일까요?
별자리를 보려 밤하늘을 쳐다봤습니다.
단풍나무던가요? 나는 나무 이름 잘 모릅니다. 대통령께서 양해해주세요.

하여튼 울창한 나뭇잎이 달린 나무 한 그루가 밤하늘을 보려 고개를 든 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핸드폰을 꺼내어 그걸 찍었습니다.
짙은 밤하늘에 조명을 받아 오히려 더 짙푸르게 보이는 그 나무를 찍었습니다.
왠지.. 당신을 보는 듯 했습니다. 참 푸르고 상쾌한 나무.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신에게 고개 숙여 인사 드렸습니다.
국화꽃 향기를 맡으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후배가 미리 고민했더랬습니다.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이 식사 대접한다고 고생한다는데 우린 그냥 먹지 말죠?"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분 가시는 길에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국 한 숟갈이라도 나는 먹을 거다."

빵과 음료수를 나눠주시더군요.
안 울려고 했는데, 빵 한 입 베어 무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지금 또 눈물이 나네요.
살아 생전 그렇게 보고 싶었었는데.. 이 놈의 게으름 때문에.. 이제서야..

몰지각한 사람들에게서 아방궁이라 불리는 당신의 마지막 집을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
여사님 생각이 먼저 나서 애처로왔습니다.

까만 밤 사이로 당신께서 운명을 달리한 바위가 보이더군요.

역시나, 그곳조차도 단지 호기심어린 눈길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발로 엉덩이를 차주고 싶었지만, 당신의 넓은 마음을 배우고 싶어 꾹 참았습니다.

난 그 바위를 보면서 당신이 마지막 겪었을 고통이 떠올라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길을 돌아서면서 계속 되뇌었습니다.
난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난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 당신께서 살아서 보여주셨던 메시지를,
이 바보.. 당신과 같은 류의 우직한 바보가 아니라 진짜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인 이 바보는,
이제서야,
당신이 가고나서야 당신께서 보여주고 싶어하셨던 메시지 하나를 가슴에 담습니다.

열정.

대통령님, 그리고 노짱..

당신의 메시지는 분명히 사람을 위한 열정입니다만,
나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일단은 열정에 불을 먼저 붙이려 합니다. 덕분에 이미 불붙었는지도 모르죠.
가슴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머리에는 사람이 시작되려 합니다만, 워낙 조변석개하는 성격이라 섣불리 약속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사람을 머리 속에 새기려 노력을 계속 하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

난 그대가 가신 그 세상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압니다.

노짱 당신은 말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다시 살아 들어온 거에요.

당신의 가족들은 한동안은 너무나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이라는 남편, 당신이라는 아버지, 당신이라는 할아버지, 당신이라는 동생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건강하게 일어들 나실 겁니다.

푹 쉬세요.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서는 다시금 열심히 앞장 서 주세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 몇 명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글이다.
글을 올린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계셔서 행복할 때였다. 아래 글을 원래 카페에서 옮기면서 이모티콘 같은 것은 생략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가슴에 다시 돌아 오셨지만, 그래도 아직은 행복하게 맞이할 때는 아닌 것이다. 아직은 그의 물리적 부재가 내 눈에 눈물을 솟아 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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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2일 새벽의 꿈 이야기.

요즘에는 일손이 잘 안 잡힌다. 자리에 앉아서 집중이 잘 안 된다는 얘기다. 정권이 바뀐 이후 특히 심해진 증상이다. 내가 나라 걱정 한다고 나라 운명이 좌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뽑아도 정말 잘못 뽑았다. 민주주의 투표로 결정된 것이니 뽑힌 놈을 탓하기 보다는 뽑은 놈들을 먼저 욕해야 할 것이다.

내게 있어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진행형이다. 대통령의 자리에 걸맞는 철학자로서 존경한다. 그토록 욕을 먹으면서도 우직하게 원칙을 고수한 그 뚝심과 배포를 본받고 싶고 존경한다. 

이명박에 대한 우려와 염증, 그리고 떠난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둘이 동시에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의 계시성 또는 예지몽이라는 그런 현상은 믿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신기했던 것은 큰 아이 잉태 당시 아빠인 내가 꾸었던 태몽이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한번의 더 신기한 꿈을 꾸기는 했는데 그 꿈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대체로 서양과학의 한 계통인 심리학에서 말하는 꿈 이론을 믿는 편이다. 잡다한 일상의 경험이 무의식 저장고로 들어가는 와중에 나타나는 잡음 비슷한 것.

어쨌든, 나는 이명박과 노무현 대통령이 동시에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이명박 옆 또는 뒤에 앉아 있었다. 어떤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싫어함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비록 꿈 속일지라도, 나는 떨었고 긴장했다. 내 가슴 속 한 켠에 독재 시절의 공포 또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알랑방구 근성이 살아 있는지 모를 일이다.

꿈에서는 장면이 확확 바뀌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래서 꿈이란 일종의 잡음 현상일지도 모른다.

장면이 바뀌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했다. 꿈 속에서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그는 전 대통령이었고 이명박은 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노무현은 여전히 대통령이고 이명박은 그냥 이명박일 뿐이다. 

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이 같이 길을 걸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허름한 동네였다. 길 포장도 없었고 질척거리는 골목길이었다. 수행원 한 명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슨 신분으로 그들 뒤를 따라갔는지 몰라도 여하튼 나까지 총 네 명이 그 어둡고 질척거리는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꿈 속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경호원도 없이 이렇게 노출되서 걸어도 되나 걱정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이 나눈 대화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냥 두리뭉실한 얘기였다. 노 대통령은 그냥 덕담 같은 것을 던졌고, 이명박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준이었다. 

꿈의 막바지에, 정말 질척거리면서 시커멓게 지저분한 길을 만났다. 꿈 속에서 내 신분이 뭐였는지 모르지만 뒤 따라가는 나 조차도 꺼리는 길을 노무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이명박은 그저 그냥 평범하게 따라간 것 같고, 나는 구두는 어쩔 수 없더라도 양복 바지 만큼은 그 더러운 시궁창에 가까운 흙탕에 버리지 않으려고 바지를 바짝 끌어 올렸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그저 당당히 앞을 걸었다.

시궁창 흙탕길을 벗어나 무슨 언덕 같은 곳에 이르렀다. 언덕 아래에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범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괴한이 한 여성을 납치하는 장면이었다. (잠재 기억으로 재편되는 과정의 잡음이라는 측면에서 꿈을 보자면, 이 장면은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의 범죄 뉴스가 내 기억 속에서 정리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레 넘어간다. 순식간에 나는 경호원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범죄 현장을 보면서 경호원 본연의 자세가 되어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에게 빨리 몸을 숨길 것을 지시(?)했다. 꿈 속에서는 비록 경호원의 신분임에도, 실제로는 그런 일 한번도 겪지도 그리고 경호라는 일 근처도 안 가본 입장이어 그런지 몰라도 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꿈을 깨고 다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이어지는 꿈이었는지 몰라도.. 

꿈의 마지막에서 밝혀진 바, 그 범죄 현장은 실은 범죄 현장이 아니라 어떤 철없는 젊은 여성 운전자가 대통령 동선에 차를 주차했고, 그 때문에 경호 인력들에게 연행되는 현장이었다. (실제 세계에서 이게 말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본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대체로 보면 평범한 개꿈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시궁창길을 묵묵히 당당히 걸어가던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비록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찝찝하지만 그를 따라가던 나. 여기에 무슨 상징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3월15일 새벽..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처음 알게 된 1988년 청문회 이래, 그를 열광 지지하던 (물론 지금도 전폭 지지) 지난 몇 년의 세월 포함하여 20년이 되도록 꿈에서 본 적이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한 주 동안 내리 두 번 꿈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두번째 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봉하마을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내 옆에는 비서관이 앉아 있었는데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꿈의 끝에서 나중에 나와 소주 한 잔 하기로 했는데..

두번째 꿈에서 그래도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은 노무현 대통령과 그 자리의 여럿이 (물론 꿈속의 나 포함) 주먹을 서로 맞대고 뭔가 다짐을.. 거창한 다짐이라기 보다 뭔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의 소박한 다짐을 했는데 .. 이 휘발성 기억으로 인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 주 동안 두 번이나 노무현 대통령을 꿈 속에서 보았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소위 말해 돼지꿈을 꾼 기분이었다. 물론 첫번째 꿈에서는 복돼지(노무현 대통령) 말고 사람돼지도 나온다.


- 진흙탕을 묵묵히 걷던 노무현 대통령,

- 퇴임 후의 식사 자리에서 무언가를 다짐하던 노무현 대통령,

꿈 속의 이 두 장면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싶다. 이 따위 나라 떠나버리고 싶다는 내 마음을 달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예지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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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7일에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꿈 이야기.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물리적 육체로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아직도 그리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위대한 불길이 되어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세대가 늙어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평안히 쉬세요. 노무현 대통령님.

내 가슴에 다시 찾아 오셔서 반갑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다. 삐딱하게 보면 매우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인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씹어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고 당연히 맞는 말이다.

 

교육은 중요하다. 내 후손의 후손들이 잘 살기 위해서? 오로지 우리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이 최강의 집단이 되어 남들 등쳐 먹고 살기 위해서? 물론 그런 뜻으로 저 귀한 말을 써먹는 못된 놈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교육은 한 인간의 완성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위한 토대이기 때문에 백년을 내다보는 마음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교육은 중요하다. 입시 시험 잘 봐서 명문대 가고, 고시 잘 봐서 전문직종 자격증 따기 위해 중요한 사항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고귀할 수밖에 없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고,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외롭고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다.

 

대학부터라면 몰라도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평등한 교육기회가 모든 사회 구성원 즉, 민중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이란 너도 나도 똑같은 성적 받기라는 몰상식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다.

 

미리 말하자면, 내 주장의 핵심은 사교육 전면 금지시키고 공교육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 아주 간단하다. 사교육을 엄격히 단속/처벌하면서 공교육 교직원 수입을 고소득 직종의 것으로 만들어주면 된다.

구미 선진국들의 교직원 수입이 별로 높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질투 어린 주장은 그만 입 다물어 주기 바란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기준이 있으면 되지, 왜 편할 때마다 구미 선진국의 별 희한한 것까지 다 따라 해야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 선생님 아니다. 교직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내 아내? 가정주부이고, 교직을 한 때 생각한 적 있지만, 이제 나이로 보나 여러 조건으로 봐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내 일가 친척? 생각나는 모든 일가 친척의 직업을 떠올려 볼 때 사촌 형수 한 분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설마 내가 주위 일가 친척 중 사촌 형수 한 분의 장래 수입 걱정 때문에 교직원 수입 팍 올려주자고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왜곡된 정신의 소유자가 없기를 바란다.

 

고등학교까지의 공교육 종사자들 연봉을 일류 대기업 직원 수준으로 확 올려야 한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로 교직원 연금 제도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 결론적으로 선생님 되는 것이 대기업 직원 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나라 공교육이 살아난다. 교직원이 인기 직종이 되면 당연히 우수 자원이 몰려들 수밖에 없고, 사회적 우수 자원이 어린 아이들 교육을 맡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환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경제 활동을 할 즈음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되지 말라고 해도 이미 최강의 선진국에 진입해 있을 것이다.

 

우수 자원이 너무 선생님만 지원하면 곤란하다고? 글쎄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고소득 전문직이라 불리는 변호사, 의사, 변리사 등등 그런 직업 다 합한 숫자와 초중고 선생님들 다 합한 숫자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고 검색해볼 의향도 없다. 중요한 것은 머리 똑똑한 우수 자원이 변호사나 의사 하는 것 보다는 선생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이다.

 

변호사나 의사를 천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직업 역시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변호사와 의사는 그 직업의 본질을 볼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지 대단히 뛰어난 두뇌가 결코 선행 조건이 아니다. 변호사란 원래 억울한 사람을 대하고 보하는 것이 그 직업의 본질적 존재 이유 아닌가? 가진 사람 내지 가지고자 하는 사람의 이권을 대변하는 직업은 말 그대로 번역하면 변리사지 변호사가 아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원 수료하면 변호사 자격 외에 따라붙는 여러 추가 자격증이 있고 그 플러스 알파 중에는 변리사 자격도 있다고 한다. 이 줏어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참 개탄스러울 정도로 무소불위적인 사법시험 제도가 아닐 수 없다. 판검변이 동시에 나오는 시험에 덧붙여 변리사 자격증이라니! 최고 우선순위 개혁 대상이다. 여기서 또 첨언. 나 변리사 아니다. 시험치기도 너무 늦었고, 일가 친척 중에는 아무도 없다.)

 

의사도 마찬가지. 의사라는 직업 구성 요건의 우선 순위는; 사람에 대한 사랑 >> 오랜 시간의 경험 > 손기술 > 제반 지식이다.

의사라는 직업 구성 요건을 위와 같이 확실히 결론짓게 만드는 최근의 일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 큰 아들의 맹장 수술 건이다. 맹장이라는, 나 같은 문외한의 피상적 지식으로는 그 확실한 증상을 두고 종합병원 의사들은 이틀 간이나 고민을 했다. 이 말은 결코 내가 의사를 무시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의사들이 이틀간이나 고민한 것이다. 돈벌이 때문에 함부로 사람 몸 우선 찍찍 찢어발겨놓고 보던 시대는 지났다. (큰 녀석 생후 2개월 때 병원 응급실에서 그 의사 새끼의 씨불거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 애 배를 열어봐야 알죠.” 사람 몸이 자동차 보닛도 아니고 허 참 새끼스러운 의사 새끼였다.)

 

모든 생명이 무릇 다 그렇겠지만, 특정 생명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는 특히 더 신비스럽고 오묘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므로 배 아프다고 울상 짓는 큰 아이를 두고 의사들은 심사숙고 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심사숙고 자체가 더 고마웠던 것이다. 맹장염 하나를 두고 그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보여주는 그 화려한(?) 증상들이 의학 서적 만권 읽어 외운다고 제까닥 나올 수가 없다는 증거다. 따라서 의사라는 직업에는 사랑과 경험이 지식에 많이 우선하는 것이다.

 

, 그리고 변호사는 잘 몰라도 의사도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이어야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결정적 순간에 사람 목숨을 다루는 직업 아닌가.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돈이라는 형태로 보상되어야 마땅하다. (또 첨언. 나는 의사가 아니며 내 일가 친척 중에도 의사가 없다. 참으로 평범 그 자체인 집안이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변호사나 의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만 크다면 내 아이가 덜 떨어진 이상주의자가 될지 모른다. 머리만 똑똑하다면 내 아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출세 지향적인 놈이 될지도 모른다. (정의를 빙자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일부 이익 집단들을 우리는 지금 생중계로 보고 있다. 사실 그 직업군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엄정한 객관성이다. 정의를 우선 순위에 두게 되면 지금 우리가 똑똑히 보는 것처럼 불의와 탐욕을 정의라고 지 맘대로 정의하는 볼썽 사나운 꼬라지를 맞이하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똑똑함과 사랑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도 당연히 많은 직업이다. 소위 초딩이라고 불리는 요즘 애들. 한 마디로 굉장한 녀석들이 꽤 있다. 나 개인적으로 모 초등학교에서 자원 봉사할 때 정말이지 애새끼 대가리를 콱~!’이라는 소리가 목구멍 직전까지 올라오게 만든 놈들 많았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대단한 스트레스 면역성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님은 내 아이를 상당 시간 가르치고 길러주는 분이다.

 

학원? 이건 사설이고 사교육이다. 학원? 나도 큰 아이 보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기 싫어하는 녀석 내가 억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다 하니 나는 그냥 학원비를 지원해줄 뿐이다. 제 발로 가다니 기특한 녀석이라고? 절대로! 나는 내 아이가 기특하다기 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몇 발을 앞서 간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녀석이, 지 진로를 생각해보고 이것 저것 알아보더니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학원엘 가야겠다고.

 

아이의 현재 꿈은 천체물리학자다. 나는 틈나면 말한다. 천체물리학자 되는 자격에 과학고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하지만 아이는 확고부동하다. 자기 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고에 가야 한다고. 아이의 이 확고부동함에 논리는 없다. 다만 이 비뚤어진 입시 풍토가 아이를 그렇게 세뇌시킨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되려면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려면 특목고 가야 하고, 특목고 중에는 과학고가 제일 좋고. (내 지금 솔직한 마음은 특목고를 당장 다 때려부수는 것이다. 특목고 학생들, 미안하다. 이 애비 마음 너희들이 학부모 되면 알 거다.)

? 한국 사람이다. 한국 부모다. 과학고 가고 싶어 제 발로 학원엘 가겠다는데 그걸 굳이 뜯어 말릴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다. 아니 생각은 자주 하지만 실행에는 절대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부모니까.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 은근히, ‘나는 과학고 학생 학부모다.’라는 자랑을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지 나도 모른다.

 

어느 일본 사람이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봤다. 그 중에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한국 경제 살린다고 강이니 운하니 이런 삽질만 할 생각 말고 사교육을 당장 전면 폐지하라고. 그러면 사교육에 들어가는 돈이 자연스레 내수 경제 활성화에 쓰인다고. 사교육에 쓰이는 돈은 결코 생산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지극히 쉬우면서도 당연한 말이다. 소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 왜 도대체 사교육을 이렇게 그냥 손 놓고 쳐다보고만 있는지 참 답답하다. 하기야 어떤 사람은 공교육 자리를 노리면서 사교육의 돈도 빌렸다지. 그 정신 세계가 참 궁금하다.

 

아이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가끔 보노라면, 학원 교육의 폐해를 절실히 느낀다. 아이는 수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풀이를 하는 것이고 정답 맞히기 경주를 하는 것이다. 수학의 아름다움을 음미해야 마땅할 나이에, 문제 풀이기 경주에 내몰리고 있고, 학원에서는 열심히 오로지 문제 푸는 요령만을 가르치고 있다. 위에 말한 일본 노신사의 말마따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본질적으로 생산적일 수가 없는 이 미친 게임에 나도 돈을 쏟아 붓고 있는 이 현실이 참으로 밉다.

 

그래서 나는 공교육 선생님들의 대폭적인 연봉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세금 증가? 나는 기꺼이 부담할 것이다. 삽질하자고 내 주머니에서 빼앗는 돈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아름답게 가르치라고 선생님께 드리는 대가이므로 나는 흔쾌히 내겠다는 것이다.

 

선생님들 연봉을 대폭 인상하면 초반에는 몇 가지 역풍이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 교사직에 있는 선생님들. 이 양반들 사실 작은 로또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력 들이지 않고 거저 먹는 셈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과격하다고 느끼는가? 과격한 표현에 앞서 당근 자체가 더 달콤하지 않나? 이런 로또에 대해 당연히 선생님이 아닌 직군 종사자, 즉 내가 포함되는 바로 그 선생 아닌직업군의 불만은 당장 불거져 나올 것이지만 할 수 없다. 이런 일시적 갈등은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냥 뭐, 지금 당장 선생 직업 가진 친구들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술 얻어 먹는 것으로 참아 넘기는 수밖에 없다.

 

한편 사교육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면 몇 명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당장 사설 학원 선생들의 직업이 끊기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소정의 평가 단계를 거쳐 공교육계로 흡수하면 된다. 이 평가 단계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길 텐데 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그릇이었다면 애초 사교육 분야에서도 종사하지 않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사자들로서야 당장 직업이 끊기니 불만이 엄청나겠지만.

그런 불만에는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시대의 변화에 의해 사라지는 직업의 예는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버스 안내양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여객기 항법사나 기관사도 마찬가지 예다. 전투기 조종사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직업이다. 무인 전투기들의 등장을 보면 미래가 뻔히 보인다. 이런 예들에 따라, 사교육을 전면 금지하자는 내 주장이 실현될 경우, 직업을 잃게 될 학원 선생들께는 보다 큰 틀의 차원에서 이해를 부탁 드리는 바다.

 

무릇 모든 개혁에는 약간의 퇴로는 열려 있어야 한다. 탈출구로서의 퇴로든, 퇴행으로서의 퇴로든 말이다. 스스로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숨 쉴 구멍 즉, 이 경우에서는 고급 사립학교라는 기회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략 인구 백만명 당 약 100명의 한 학년 정원 정도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초중고 총 12년을 합하면 인구 백만명 당 1200명의 고급 기회 내지 맘껏 돈 쓸 기회 또는 돈 자랑 할 기회는 열어주자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대략 5천만이므로 전국적으로 50개씩의 초중고 고급 사립학교를 열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립이므로 학비를 얼마를 받건 그건 그 학교의 재량으로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 선발을 실력으로 뽑건, 경매로 뽑건 그것 역시 학교의 재량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F4 왕자님과 그 부모들의 욕망 배출구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 방식이 실현되면 한 해에 5천명의 특권층 자제들이 대학 진학 기회에서 다른 공교육 출신 및 검정고시 출신들과 겨루게 될 것이다. 대학 입학 기준이 매우 객관적이고 엄격한 한, 매우 특수한 교육을 받아 매우 뛰어난 객관적 실력을 갖춘 학생이 자기 입맛대로 가고 싶은 대학 골라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실력으로 인정해야 한다.

 

특수 고급 사립 교육을 받은 5천명의 학생 모두가 공교육 출신 학생들을 압도적으로 앞설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게 겁나서 그런 사립 기회조차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매우 못나고 왜곡된 공산주의적 사고 방식에 물든 것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특수 교육을 한들 저 5천명 중에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은 암만 후하게 잡아도 5백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45백명의 실력은 공교육 출신의 우수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다.

 

부모 잘 만나 최고의 사립 학교에서 고급 교육을 받고 대단한 실력을 갖춘 아무리 후하게 잡아 5백명 남짓의 학생. 그 정도는 우리가 경쟁의 우위에 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다. 그마저도 인정 못하면 그건 정말이지 못난이 물귀신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대학 입학에 관한 한 정원 외 기부제 입학(, 사립대만)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립대학 당 한 학년에 학과당 2명 정도는 기부제 입학을 허용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시나리오를 보자. 부모 잘 만나, 특수 사립 초중고를 거치게 되는 한 학생. 그런데 애가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논다. 더구나 성격도 더럽다. 한 마디로 눈꼴 시다. 그런데 이 녀석이 부모 돈으로 한국 최고 사립대에 기부 입학을 한다. 그런데 얘 적성이 그 학과에 딱 맞아서 거기서 드디어 숨겨진 재능을 발휘해서 학과 수석 졸업하고 그 이후 승승장구한다. 여전히 성격은 더럽다.

 

, 가만 생각해보자. 이런 아이가 기부 입학해서 수석 졸업했다면 그건 기부 입학제의 폐해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이런 아이 때문에 기부 입학의 폐해를 운운하고 절대 불가 방침을 말한다면 그 역시 못난 물귀신이요, 비뚤어진 공산주의자일 따름이다.

확률적으로 봐서, 그냥 놀다가 기부 입학한 아이가 과 수석을 차지할 가능성은 매우 낫다. 졸업이나 제대로 하면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 교수가 부잣집 또는 권력층 아이 협박 때문에 또는 미리 눈치 봐서 학점 후하게 주는 꼬라지는 절대적으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이런 덜떨어진 사례는 이 글에서는 더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이 적성이 드디어 맞아서 능력을 꽃피웠다면 그건 박수 쳐줄 일이지 결코 욕할 일이 못된다. 또한 뒤늦게 적성과 전공의 궁합이 그렇게 잘 맞았다면, 그건 대학 당국의 선발 능력을 탓할 일이지 결코 그 아이 또는 기부 입학의 폐해를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이제 정리하자.

 

사교육은 당장 전면 폐지

공교육 선생님들 연봉 대폭 인상. 일류 대기업 수준 또는 그 이상

인구 백만명 당 한 학년 정원 100명 수준의 사립학교 허가

사립 대학 기부 입학제 허가 (많이 잡아서 학과 정원 당 2명 정도)

 

우리 큰 아이는 이미 늦은 시기에 들어가겠지만, 둘째라도 제발 좀 정상적인 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환경에서 자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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