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인간이라 불릴까? 이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쥐가 자기 새끼는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실제로 본 '장독 사이에 끼인 쥐새끼 눈깔'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징그러워서일까?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경멸하고픈 마음에서일까?
어쨌든 쥐는 싫다.
또한, 그런 독새낀 쥐새끼 눈초리를 하고 사는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고, 그런 독새낀 쥐새끼 눈초리를 한 사람은 쥐 만큼이나 경멸스럽다.

'탐욕의 시대'라는 책을 읽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해온 장 지글러가 쓴 책이다.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아마도 이 책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일 것이다.
탐욕이 빚어낸 비극을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인간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독새낀 쥐새끼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탐욕의 시대'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2008년의 마지막 날.

중학 1학년인 큰 아들과 함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봤다.

원래는 키아누 리브스의 '지구가 멈추는 날'을 보려 했었는데, 아이 왈, '친구가 봤는데 재미 없다더라'.
중학 1학년이면 웬만한 판단 능력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이들 말이라지만 들을 때는 들어야 한다.
아들이 전해준 아들 친구의 감상+줄거리를 들으니 상당히 '지구가 멈추는 날'은 유치하다는 판단이 내게도 들었다. 물론 볼거리는 대단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볼거리 하나가 끝맺음의 유치함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은 나름 오랜 영화 관람 경험으로 잘 아는 터다.

그래서 제목만 봐도 더 유치할 것은 뻔하지만,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보기로 했다. 유치함을 이미 각오하고 보면 가끔 대어를 건질 때도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대어는 건지지 못했다. 예상 그대로였다. 유치는 유치일 뿐. 할리우드의 얄팍함은 여전할 뿐. 다만, 아들이 재미있어 했으니 아비로서 그에 만족할 뿐.

컴퓨터 그래픽이 남발되는 영화와 실제 자연의 경치를 그대로 담은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연처럼 보이는 경치를 컴퓨터가 그릴 수는 있지만, 장대한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진짜 자연의 모습을 컴퓨터는 절대로 담지 못한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영화는 말 그대로 쪼맨한 컴퓨터 스크린에서 보나 대형 스크린에서 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하지만, 진짜 자연의 경치를 담은 모습은 다음 순서로 감동을 준다.
진짜 경치 >>> 영화 스크린 >> 컴퓨터 스크린

'늑대와 춤을' 이 영화가 내게 던져준 메시지는 미국 근대사에서의 인디언 학살 비극에 앞서, 경치 한번 끝내준다는 감동이었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아이 따라 간 극장에서, 영화의 뻔한 이야기나 컴퓨터 그래픽이 남발되는 지저 세계 보다, 지저 세계의 입구가 있는 아이슬란드의 실제 배경이 내 눈을 더 당겼다. 정말 한 번 가보고 싶은 경치다.

컴퓨터 그래픽 남발은 좀 삼가해주시기를 영화 관계자들에게 바라고 싶다.

이 책이 어느덧 15권까지 나왔다.
나는 아마 8~9권 정도에서 멈춘 것 같다.

사실 시이저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는 좀 지루하게 이어진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자신은 로마 문명에 대한 광팬이라고.
저자가 직접 말한 적이 있는지 기억에 없는데, 독자인 내가 보기에 시오노 나나미씨는 로마 문명에 덧붙여 시이저에 대한 광팬이라 말하고 싶다. 비꼬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열정에 대한 일종의 찬사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시이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작가의 힘이 크다.
그 전에는 시이저라 하면 뭔가 유약하면서도 코믹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는데 여기에는 할리우드식 왜곡 문화에 영향받은 내 책임이 크다. 물론 그 원인은 싸구려 문화다.

작가가 시이저를 통해 (원작에서는 카이사르라 불렀던가?) 설파하는 가슴 찌르르한 말이 하나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반면, 위대한 사람은 보고 싶지 않은 면도 본다."
내 기억이 정확치 않음은 참고하시라.

시이저는 (중간에 힘든 고비도 나오지만) 사실상 연전연승을 통해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는다.
시이저는 세계 정복에는 관심이 없었다. 로마도 그랬다.
시이저와 로마는 세계 정복이 아니라 중심 로마의 안전에 최대한의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로마 제국의 변방은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시이저는 어느 정도 선에서 선을 딱 긋는다.
라인강 너머로 가지 말고, 영국으로 가지 말고, 도나우(?)강 너머를 가지 말고 등등.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을 알기 전부터 나는 서서히 무작정 친미/숭미에서 벗어난 입장이 되었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현대 로마 제국의 정체를 더 확연히 알게 되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자연스레 그로부터 미국을 읽었다.

뭔 일만 터지면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청 앞에서 성조기 휘둘러대는 이상한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미국을 동맹이나 혈맹이라 부른다.
6.25 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6.25라는 비극에서 미국이 대단히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특히나 외교에서 댓가 없는 봉사란 없다. 계산 없는 행동은 없다.

외교란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고, 전쟁이란 총을 든 외교라고 한다.
(내 기억에 이 말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것 같다.)

남의 나라 국기 들고 우리나라 수도 한 가운데서 시위하는 무리들에게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만일 이것을 읽고도 현대의 로마 제국인 미국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그 얕은 지적 능력을 탓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반미는 용공도 아니고 친북도 아니다.
친미라 해서 반드시 매국이라 부를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
우리나라 시위에서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든다면 그것은 확실히 매국이다.

남의 나라 국기를 들기 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명령하고 싶다.)

시리즈가 너무 길다면 1권부터 시작해서 시저가 죽는 대목까지만 읽기를 바란다.
(아마 7권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의 미국을 이해하고 싶으면 최소한 그 정도는 읽어야 한다.

그러고도 혈맹 미국을 좋아하는 친미주의자가 되고 싶다면 그건 당신의 철학이니 내가 뭐라 할 바 아니다.
다만, 제발이지 시위할 때 성조기 좀 흔들지 마라. 짜증난다.

7월27일. 놈놈놈을 봤다.
광고를 얼마나 퍼부어댔는지 4살짜리 딸아이도 이 영화를 보고 싶어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 네 식구는 놈놈놈을 보러 갔다.

딸아이. 재미따.
큰아이. 엄청 재밌다.
아내와 나. 도대체 이게 뭐냐?

몇 몇 추격전은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그 잘 생긴, 부럽도록 잘 생긴 정우성이 말 달리며 한 손으로 총을 휘휘 돌리는 모습은
남자인 내가 봐도 눈이 둥그래지도록 멋있다.
이병헌. 잘 생겼다. 악몽을 꾸고 일어나 지네에게 칼 던지는 장면에서 배에 힘을 너무 준 모습은 옥의 티다.
송강호. 연기가 자연스럽다. 가장 공감이 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다다.
영화 중반부는 상당히 지루하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이거 어째 이문열 소설 식으로 흐지부지 끝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엄청 허무하게 끝날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감돈다.

역시나.
결말은 허무다. 뭐하러 그 고생을 했는지, 뭐하러 진작 결판내지 않고 거기까지 갔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영화를 그냥 즐기면 되지, 뭘 따지냐고.
나는 말하고 싶다.
오락 영화라도 스토리는 좀 갖추어야 하지 않냐고.

사은품으로 받은 공짜표 두 장이 끼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제값 내고 봤으면 상당히 속 따가웠을 영화다.

감독에게 말하고 싶다.
다음에는 스토리를 좀 갖추라고.

감독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 싶다.
그래도 반지의 제왕이 주는 허무함 정도는 아니었다고.

오일러를 모르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특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기름장사 oiler가 아닌 수학자 Euler다.

경문사에서 펴낸 '오일러가 사랑한 수 e'는 "엘리 마오"라는 작가의 이름만 보고 산 것이다. 그런데 내용은 한마디로 대실망이었다. 첫째, 엘리 마오라는 수학자의 이름을 내 머리 속에 깊게 각인시킨 '무한 그리고 그 너머'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의 글들이었다. 어찌 보면 '무한..'에서 얻은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무한..'을 저자가 한번 더 울궈먹은 듯한 느낌도 있다. 저자인 엘리 마오가 실제로 어느 것을 먼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이 본 읽은 순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둘째, 번역이 엉망일 뿐더러 도처에 오타가 있다. 경문사의 책은 앞으로 더 사지 않을 것이다. 경문사에 대해서는 '신의 베틀'이란 책에서 톡톡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한번쯤 있을 법한 실수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2연타석으로 당한 다음에야 소비자인 내가 생산자를 옹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문법적 오류, 오타는 물론이요, 수식에마저 잔뜩 오류가 있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빠짐 없이 각종 오류가 들어 있다. 읽는 내내 짜증이 고개를 들어 애를 먹었다.

원 제목은 "e: the story of a number"다. 원 제목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한다. 이 책은 e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고찰은 자연로그의 밑수인 e에서 출발한다.
출판사(경문사)는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원 제목인 "숫자 이야기"를 '오일러가 사랑한 수'로 둔갑시킨 것일까? 오일러가 등장하는 대목이 다른 수학자들에 비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목 자리를 차지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이 책은 내용 자체도 상당히 어렵다. '무한 그리고 그 너머'가 고교 이과 수학 수준으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것임에 반해 e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 이공계 수학 수준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 읽는 내내 너무 어려웠다.

미치오 카쿠(Michio Kaku)는 일본계 미국 이민 2세 물리학자입니다.

디스커버리 과학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양반 이름은 미처 몰랐어도,

얼굴을 보면 "아, 이 사람!" 하실 겁니다.


미치오 카쿠가 쓴 "평행 우주"를 정말 재미나게 읽어서 이제 거의 끝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공감가는 내용이 있어 발췌합니다.


페이지 533 ~ 534 중.


.. 스티븐 와인버그는 그의 저서 "태초의 3분 (The First Three Minutes)"을 통해

'삶의 의미'라는 문제를 색다른 형태로 부각시켰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주는 더욱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위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우리에게 비극적인 우아함을 안겨준다."

와인버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들 중에서 이 문장이 가장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하였다.


훗날, 그는 다음과 같은 글로 또 한 번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종교가 있건 없건 간에, 좋은 사람은 선을 행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 대부분의 동기는 종교가 부여하고 있다."


와인버그의 발언은 우주의 의미를 알고 있는 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세속적인 철학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은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비극적인 것은 대본의 내용이 비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대본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에 비극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학적 무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학적 무한에 대한 다른 좋은 책으로는 '무한 그리고 그 너머'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꼭 집어내기 어렵습니다.

'무한 그리고 그 너머'는 수학 자체에 더 집중하고,

'무한의 신비'는 수학적 무한을 향한 학자들의 정열과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들이 더 많습니다.

 

칸토어(또는 칸토르라고도 알려져 있음)가 발견한 수학적 무한의 이해를 위해서는

'무한 그리고 그 너머'가 더 추천되고,

칸토어의 생애와 아픔을 이해하는데는 '무한의 신비'가 딱 맞습니다.

 

학창시절, 공학수학을 배우면서 크로네커 델타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이 크로네커라는 사람이 '무한의 신비'에서 보니 상당히 골때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더군요.

 

시사 용어로 하자면 수구꼴통보수가 크로네커입니다.

칸토어가 후일 심각한 조울증에 빠지는데 크로네커가 분명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무한의 신비' 후반부에는 괴델 이야기도 자세히 나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괴델을 단지 '불완전성 정리' 발견자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칸토어의 정신적 후계자인 셈이더군요.

 

이공계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필독서로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진리탐구에 관심있는 분들에게도 필독서로 권합니다.

진리는 논리를 앞서지만, 그래도 진리를 향한 한 커다란 징검다리를 논리가 만들고 있으니까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