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르는 물고기 구피. 정확히 말해 주종목이 구피고 딸린 식구들로 생이새우, 체리새우, 네온테트라, 그리고 코리도라스가 있다.

아내가 미장원에서 종이컵에 얻어온 구피 네마리가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종이컵에 들어 있던 작은 멸치만한 이름 모를 물고기 구피 네 마리. 아내는 녀석들의 이름이 구피라 했다. 구피? 웬 개 이름? 그랬다. 나는 이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초등학생 실과 시간이었던가? 금붕어 기르는 방법 중에 물 갈아 주는 이야기만 기억이 났다. 수돗물을 받아서 며칠 묵힌 후 갈 것. 그렇지 않으면 수돗물이 가진 독성으로 물고기가 죽는다. (물고기를 죽이는 수돗물을 사람은 마시는 거다. 물론 끓여 마시는 것이 대세지만.)

나는 구두쇠다. 그래서, 물론 신기하고 이쁘기는 하지만, 이런 물고기들에게 돈을 들이기는 싫었다. 부엌에서 쓸만한 그릇이 없나 뒤적거렸다. 고추장 유리병이 눈에 들어 왔다. 깨끗이 씻었다. 하루 묵힌 수돗물을 붓고 종이컵보다는 많이 더 넓은 유리병으로 옮겼다.

어린 구피 녀석들은 그 유리병에서 석 달을 살았다. 애견가에 해당하는 애어가들이 보면 나를 아주 무식한 놈이라 부를 방법으로 물갈이를 했다. 작은 유리병 속에서 자라는 네 마리의 물고기. 이틀이면 물이 뿌옇게 되고 시큼한 비린내가 났다. 그때마다 나는 물을 싹 갈아 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런 완전 물갈이는 물고기들에게 대단한 스트레스라고 한다. 나는 그걸 몰랐다. 다만 맑은 물을 주고픈 욕심이었을 뿐.

그러던 어느날. 약 석 달쯤 지난 날이었을 것이다. 유리병 속에 뭔가 작고 까만 것이 휙 움직였다. 나는 순간 똥덩어리인줄 알았다. 물도 이미 많이 뿌옇게 되어 있었다. 물 갈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리병을 한번 확인하는데 길이는 쌀알만하고 굵기는 성냥개비 불탄 이후 재만한 것들이 물 속에 있었다. 새끼였다.

아니 언제 알을 낳았지? 궁금했다. 물 갈아준지 채 이틀. 그 사이에 알 낳고 부화되고 했나? 시간의 역추적이 급한 때가 아니었다. 일단 물이 너무 더러웠다. 새끼 여섯 마리는 숟가락으로 떠서 자그마한 컵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럴 때는 인터넷의 순기능이 참 마음에 든다. 검색어 구피. 많은 정보들. 이 녀석들이 새끼 낳는 물고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난태생. 뱃속에서 알이 부화되어 새끼 형태로 세상에 나오는 물고기. 살모사만 그런 줄 알았는데 물고기도 이런 종류가 있구나.

아이들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새끼를 낳은 어미들-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도 장하지만 새끼들의 존재 자체가 너무 감동스러웠다. 비록 미물이지만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새 생명.
그래서 어항을 샀다. 나는 그전까지는 남의 집이나 건물에서 어항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뽀글거리는 기포가 단지 공기를 공급하는 목적 하나만을 가진 것인줄 알았다. 공부를 하고 보니 아니었다. 공기 공급도 되지만 동시에 다른 여과기를 가동하는 역할도 한단다. 여과기 가동 원리도 공부했다. 공기가 아닌 전기의 힘으로 가동되는 여과기도 많았다.

어항은 금방 두 개가 되었다.

그리고 바닥의 사료 찌꺼기를 먹는다는 코리도라스도 사고, 충동구매로 네온테트라도 사고, 체리새우나 생이새우는 나름 그 역할에 대해 공부를 한 다음에 샀다.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어항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이 때문에 운동 시간이 줄어든 단점은 있지만 그냥 바라보는 자체가 즐겁다. 아내나 아이들 눈치가 보여 오히려 자제를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왜 그럴까?

나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기르는 것을 많이 바랬다. 어려서 살던 집 뒷마당에 돌고래가 사는 수족관을 꿈꾸기도 하고 사자도 꿈꾸었다. 동물의 왕국을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 아니면 내 본성 어디에 그런 동경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와중에 가정을 꾸민 이후 개도 길러 봤지만 개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두 번을 실패했다.

그러다가 이 물고기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어항을 들여다 본다. 물이 아주 맑다. 나름 나의 상식과 인터넷 정보를 결합해서 여과력도 높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맑은 물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물고기들이 건강하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새우들은 걸핏하면 죽어 나가는 것이 속상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새끼새우들도 눈에 간혹 띈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내 통제 하에서 어떤 생태계가 돌아간다는데 대한 만족감일까? 아니면 그냥 사랑일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하곤 하던데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랑이라기 보다는 통제 또는 지배에 대한 포만감 쪽이 더 큰 것 같다.

물론 개와 물고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개의 감정 표현이 훨씬 더 풍부할테니 말이다.
물론 물고기를 통제 대상 하나로만 보지는 않는다. 물고기가 새끼 낳으면 엄청 기쁘고 죽을 때면 속이 상하다.

물고기 기르기. 소위 물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물생활이 언제까지 갈런지는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몇 미터 길이의 어항을 집에다 설치하고 싶지만 공간도 여력도 자금도 없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두 개의 어항으로 계속 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겨워지는 순간이 올까? 나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밥주고, 출근 전에 잠시 또 멍하니 들여다보고 이런 일상의 반복이 재미있고 행복하다.

물고기에게 감사 표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더듬어 본다. 

나는 엄마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조상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더 많이 되감아지면 쥐를 거쳐물고기가 되고 나는 다시 작고 미약한 단세포 동물이 될 것이다.

단세포 동물은 걸쭉한 분자의 죽이 된다. 

지구는 물이 그득한 바위 덩어리다.

지구는 먼지가 뭉쳐서 만들어진다.

지구를 만든 먼지는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뿜어져 나온다.

별은 그 중심부의 힘으로 점점 더 무거운 원자를 만들어낸다.

별이 만들어지기 전에 빛이 있었다.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퍼져 나간 먼지 구름은 수백 광년에 걸쳐 흘러다니다 또다른 살아 있는 별들의 중력과 먼지 구름 자체의 전자기적 상호작용을 통해 어느 장소에서 다시 뭉친다.

다시 뭉친 별의 잔해는 또다른 별이 되고, 별이 되지 않은 다른 잔해는 행성이 된다.

그 행성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금 내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모여 나라는 영혼을 담고 다니는 그릇 노릇을 한다.

내 육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렇게 상상이라도 되지만, 내 영혼이 어디서 왔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내 영혼이나 자아는 컴퓨터 운영 시스템이나 그 위에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자아는 DNA가 가진 강한 생존 본능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 강하게 믿고자 한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에는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없는 우주는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는 우주가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누군가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내 주위에는 아직 없다.

누군가 알았을지 모르는 사람이 남긴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름과 더불어 공허해져가고 있다. 

바다를 본 사람이 아무리 바다 이야기를 해줘도 산의 사람들은 그나마 호수라도 이해하면 다행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고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물고기 이야기에서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저는 개를 두 번 길렀었고 두 번 다 실패했습니다. 개와 저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애완용으로서도, 식품으로서도..

 

저는 복날이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릅니다. 초복, 중복, 말복 세 개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양력인지 음력인지조차 모릅니다.

복날이 다가오니 어느 국제 동물애호가 단체에서 한국 보신탕 문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고 기사가 나오네요.

 

식품으로서의 개.

저는 보신탕을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시도해봤습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부서 사람들이 죄다 보신탕을 좋아하더군요.

당시 저는 신입사원이었던지라 대놓고 개 못 먹는다고 하기는 싫고, 의욕에 넘쳐서 같이 먹었더랬습니다. 생전 처음 먹은 개고기 요리는 육개장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집에서 한번 정도 더 먹었던 것 같고,

나중에 사천 살 때 굉장히 큰 보신탕 집에서 수육처럼 된 것을 한 입 먹어본게 마지막이군요.

 

제가 개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도, 그렇다고 개를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개고기 자체가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뭐랄까.. 개고기라는 말만 들으면 개가 풍기는 개비린내가 먼저 생각나서일 겁니다.

사실, 요리로서의 개를 먹어본 기억에 그런 개비린내는 없었습니다만, 사람의 선입견이라는게 무섭잖아요.

 

제가 그냥 개고기를 싫어할 뿐이지, 개고기 드시는 분들께는 아무런 호불호 감정이 없습니다.

 

아주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개 잡는 광경도 봤고, 돼지 잡는 모습도 봤습니다.

개를 나무인가 전봇대에 매달아놓고 줘패고 불에 그슬리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 끔찍하다기보다 그냥 아주 시끄러운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돼지 네 다리를 꽁꽁 묶어 자빠뜨린 뒤 목에 칼로 구멍 내서 잡는 모습에서도 불쌍하다거나 잔인하다는 기억보다는 돼지가 굉장히 시끄럽게 죽는다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측은지심에 앞서 시끄럽다는 기억이 남아있을 테고요..

지금은 아마 개나 돼지를 잡는 광경을.. 아무리 신사적(?)으로 잡는다 한들.. 직접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어릴 때의 나보다 더 순수해졌다는 것은 아닐텐데..

측은지심을 가진다는 것도 결국은 세상으로부터의 때가 묻는다는 한 현상인지.. 헷갈리네요.. ^^

 

이 세상의 동물 새끼 중에 사람 다음으로 이쁜 것이 개일 것입니다. 대체로요..

(물고기 새끼도 무지 이쁩니다.. 직접 키우는 입장에서는요..^^)

 

저희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옆집에 개 키우는데 그 집에 놀러가마 강아지가 내한테 자꾸 안긴다."

"강아지 눈을 들여다보마 이런 이쁜 눈을 한 거를 우째 사람들이 잡아먹노 그런 생각이 든다카이."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새 개 먹는 거 그거 다 모르고 하는 짓이다."

"내 어릴 때 (아버지는 해방 때 이미 고교 졸업생이셨으니 연세 많으십니다.) 기억해보마,

 키울 개하고 먹는 개는 종류가 달랐다. 먹는 거로 키우던 개는 지금 안 보인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지금 삽사리라고 주장되는 그 털 긴 개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지금 길러지는, 특히 시골 지역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사견처럼 생긴 개는, 일제 당시 우리네가 그렇게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도 길에 그 개가 버려져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통용되는 보신탕은 당연히 보신탕으로서의 효과가 전혀 없을 거라 보시는 겁니다.

 

참고로, 저희 아버지 현역 한의사이십니다. 참고들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사천살 때 뒷산 너머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본 개들은 죄다 도사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긴 자체가 아주 불쌍한 개들이었어요. 아니면 보신탕용으로서의 생을 아는 것인지.. 여하튼 표정들이 불쌍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보양 효과 없는 개들이 분명하지요.

 

도시 지역의 경우, TV로만 본 것입니다만 각종 개들이 다 있더군요.

심지어.. 애완용 강아지들까지..

여기도 분명히 그 옛날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없는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의 보신탕은 단지 심리적 만족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야 뭐.. 식품학자도 의사도 아닙니다만.. 아버지 기억에 따르자면 지금 시대는 젖소를 한우로 알고 먹는 정도랄까요.

 

젓소를 먹든, 한우를 먹든, 돼지를 먹든.. 이런 연장 선상에서 보신탕 문화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애완용 돼지도 있지만, 상당수 돼지는 식용이듯이,

애완용 개가 다음날 보신탕 상가에 등장한다해서.. 그것이 그렇게나 기를 쓰고 반대하고 데모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도둑 맞은 주인이 펄펄 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물고기 기르지만 동시에 그 살아있는 물고기 옆에서 고등어나 심치 잘 먹습니다.

 

동물은 그냥 동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육식을 장려하거나, 개고기만 특별히 많이 먹자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고기 먹는 사람을 무슨 야만인 보듯 하지는 말자는 거지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걸음걸음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곤충들이 죽어가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거기에 별로 거리낌이 없다면 개고기 문화도 그냥 하나의 문화로 보면 됩니다.

 

개고기를 반대하시는 분들이 순수 채식주의자고 육식문화 자체를 반대하는 거라면 저는 일단 고개는 끄덕거릴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있는 행동방식이고 주장이니까요.

 

그래도 한번 더 토를 달자면, 최소한 식물은 먹어야 인간이 사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고,

식물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순환합니다. 먹이 사슬이라는 다소 냉랭한 말로 이 세상은 하나의 고리를 이룹니다.

 

사람의 식습관은 그냥 지역별 문화로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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