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무척 많다. 최근 통계를 보니 기독교 보다는 불교 신자가 더 많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 주위에는 기독교가 더 우세다. 나는 스스로 무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자란 환경이나 사고방식을 놓고 보자면 불교에 아주 가까운 무교다. 주위의 그 많고 많은 기독교인들.. 이것도 아마 인연인가 보다.
내 주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시험'이나 '아버지가 주신 시련' 등의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물론 그들의 육체적 아버지가 아닌 그들이 모시는 그들만의 신을 뜻한다.
아버지라 부르면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에 해당하니 나 자신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둘이서 만나 둘을 낳았으니 자연의 대차대조표는 얼추 맞춰준 셈이다.
나는 가끔 내가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사람일까 궁금해한다. 특히 큰 아이에게는 너무 엄하게 대하는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큰 아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이 녀석이 어떤 잘못을 할 때면 가끔 감정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로서 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안 그러려 노력하지만 감정의 속도가 이성의 브레이크 보다는 항상 빠르다. 나이를 좀 더 먹어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이러나 저러나 약간은 모자란 아버지다. 하지만 나의 두 아이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내가 바로 그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할까?
능력 닿는 한 다 해주고 싶지만 가끔은 이성의 제동을 건다. 사탕 사주는 것 정도야 이빨이 다 썩도록 사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사탕 많이 사주는 것을 제어한다.
첫째, 이빨 썩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둘째, 사탕은 많이 먹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반대로, 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큰 아이는 요즘 천체관측에 무척 관심을 표한다. 그런데 가격을 조사해보니 웬만한 천체 망원경은 100만원 근처를 왔다갔다 한다. 지금은, 예전에 사놓은 약간 맛이 간 쌍안경 정도로 떼우고 있지만 큰 아이는 내심 더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 역시 웬만하면 제대로 된 천체 망원경을 선물로 주고 싶다. 하지만 그 금액이 나를 약간 주저하게 만든다.
내 능력이 아직 확실치 않아 더 해주고 싶은 것을 못해주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이렇게 두 아이의 아버지다. (둘째는 아직 많이 어린지라 큰 금액이 오가는 수준의 바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렇듯 그 누구보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의도된 시련을 주고 싶지는 않다.
사탕은 많이 먹으면 결국 좋지 않으니까 단속할 따름이다.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돌이 있다면 내가 얼른 가서 치워준다.
나는 결코, 아이들 걸어가는 길에 일부러 돌을 뿌려대지는 않는다.
크면 어련히 알아서 피해갈까. 미리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훈련을 일부러 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주신 시련'으로 느껴지는 식의 표현은 정말이지 싫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훈련시킨답시고 날카로운 돌을 뿌린다거나, 멀쩡한 아이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리는 것은 아버지로서 할 행동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지탄받아야 할 행동이다.
아이 건강이 그렇게 염려된다면, 주말에 같이 손잡고 산에 가면 된다. 산에는 돌이 많다. 자연스레 돌 피하는 훈련도 되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레 건강 단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