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무척 많다. 최근 통계를 보니 기독교 보다는 불교 신자가 더 많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 주위에는 기독교가 더 우세다. 나는 스스로 무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자란 환경이나 사고방식을 놓고 보자면 불교에 아주 가까운 무교다. 주위의 그 많고 많은 기독교인들.. 이것도 아마 인연인가 보다.

내 주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시험'이나 '아버지가 주신 시련' 등의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물론 그들의 육체적 아버지가 아닌 그들이 모시는 그들만의 신을 뜻한다.

아버지라 부르면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에 해당하니 나 자신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둘이서 만나 둘을 낳았으니 자연의 대차대조표는 얼추 맞춰준 셈이다.
나는 가끔 내가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사람일까 궁금해한다. 특히 큰 아이에게는 너무 엄하게 대하는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큰 아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이 녀석이 어떤 잘못을 할 때면 가끔 감정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로서 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안 그러려 노력하지만 감정의 속도가 이성의 브레이크 보다는 항상 빠르다. 나이를 좀 더 먹어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이러나 저러나 약간은 모자란 아버지다. 하지만 나의 두 아이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내가 바로 그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할까?
능력 닿는 한 다 해주고 싶지만 가끔은 이성의 제동을 건다. 사탕 사주는 것 정도야 이빨이 다 썩도록 사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사탕 많이 사주는 것을 제어한다.
첫째, 이빨 썩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둘째, 사탕은 많이 먹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반대로, 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큰 아이는 요즘 천체관측에 무척 관심을 표한다. 그런데 가격을 조사해보니 웬만한 천체 망원경은 100만원 근처를 왔다갔다 한다. 지금은, 예전에 사놓은 약간 맛이 간 쌍안경 정도로 떼우고 있지만 큰 아이는 내심 더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 역시 웬만하면 제대로 된 천체 망원경을 선물로 주고 싶다. 하지만 그 금액이 나를 약간 주저하게 만든다.

내 능력이 아직 확실치 않아 더 해주고 싶은 것을 못해주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이렇게 두 아이의 아버지다. (둘째는 아직 많이 어린지라 큰 금액이 오가는 수준의 바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렇듯 그 누구보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의도된 시련을 주고 싶지는 않다.
사탕은 많이 먹으면 결국 좋지 않으니까 단속할 따름이다.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돌이 있다면 내가 얼른 가서 치워준다.
나는 결코, 아이들 걸어가는 길에 일부러 돌을 뿌려대지는 않는다.
크면 어련히 알아서 피해갈까. 미리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훈련을 일부러 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주신 시련'으로 느껴지는 식의 표현은 정말이지 싫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훈련시킨답시고 날카로운 돌을 뿌린다거나, 멀쩡한 아이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리는 것은 아버지로서 할 행동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지탄받아야 할 행동이다.

아이 건강이 그렇게 염려된다면, 주말에 같이 손잡고 산에 가면 된다. 산에는 돌이 많다. 자연스레 돌 피하는 훈련도 되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레 건강 단련이 된다.


물질이라는 것은 나누어보면 참 허탈하다. 일단 100여 종류의 원자로 나뉠 수 있고, 원자를 더 분해하면 양성자, 중성자, 전자 단 세 종류의 입자로 분류된다.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의 적절한 조합이 산소도 만들고, 탄소도 만든다. 그리고 산소와 탄소의 성질은 엄청나게 다르다. 원자끼리 결합해서 어떤 화합물을 만들면 좀 더 다양한 성질이 나타난다.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가 결합하면 물분자가 된다. 두 종류의 기체가 결합해서 물이 되는 것이다. 물이 가진 성질은 수소 또는 산소가 가진 것과는 또 다르다.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물이 가진 특성을 하나 하나 추적해가다보면 결국은 소립자와 4가지 힘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소립자나 4가지 힘 그 어디에도 물이 가진 성질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서로 적절히 어우러져서 물이라는 물질과 그 특성을 만들어냈다.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다. 몇 종류의 원소가 다양한 방식으로 화합물을 만들고 이 화합물이 쌓아 올려진 어떤 개체는 생명 활동을 한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섭취하고, 스스로 운동도 하며, 심지어는 자신과 비슷한 개체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인간도 그 중 하나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를 하나 떼서 봐도, 그 세포를 이루는 원자를 떼서 봐도, 그 어디에도 '나'라는 존재의 조각조차 없다. 나는 다만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새롭게 출현한 한 특성이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자기 물질, 플라스틱, 어떤 금속, 유리 종류 몇 가지가 적절히 섞여서 컴퓨터라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분해해놓고 보면 별 특별한 의미가 없는 평범한 물질 덩어리지만 잘 뭉쳐 놓으면 편리한 도구가 된다. 

수소끼리 융합하면 헬륨이 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내놓는다. 이것은 수소가 가진 원래 특성인가? 아니면 수소와 헬륨 사이에 놓이는 불안정한 성질이 에너지로 발산되어 나오는 것인가?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의 우리가 있지만 아직 이 기나긴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단세포 생명이 등장해서 지금 우리에 이르는 어느 단계에선가 지성 또는 영성이라는 것이 새롭게 탄생되었을 수도 있다. 그것의 특성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 악어 어미가 곧 자식이 될 자기 알을 지키려는 그 본성을 단지 물질적 반응의 하나로만 볼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침팬지가 죽은 어미 또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물체 두 개가 중력에 이끌려 서로 잡아당기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결국 이 여행의 끝은 하나로 귀결될지 모른다. 어떤 목적이 있었기에 우주가 탄생되었고 그 여정의 중간에 우리가 잠시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모여 물의 특성을 만들듯이, 더구나 물분자 하나로는 아무 역할이 없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개수로 모여야 마침내 물의 성질이 드러나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원대한 설계의 한 부분일지 모른다. 새로운 특성을 만들기 위한 한 재료로서 우리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아직은 모른다는 말 밖에는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최근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살짝 이 글에 맞게 바꾸었다.
"목표로 가는 과정 자체가 목표에 이른 후의 보상이다."

사진 = http://antwrp.gsfc.nasa.gov/apod/ap081208.html

저 한 장의 사진 속에 찍힌 많고 많은 별들. 우리는 저 중의 평범한 하나인 태양에 딸린 식구들이다. 물론 저 사진 속에 태양이 직접 찍혀 있을 수는 없다.

저 수많은 별들 중에 과연 그 어느 것도 생명을 지닌 행성을 거느린 것이 하나도 없을까? 없다기 보다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만 이 커다란 우주는 안타깝게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런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생명의 유무는 빼고라도 행성을 거느린 항성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은 천문 관측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직간접적으로 밝혀진 대부분의 행성이 생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법한 목성 이상급의 존재로 드러나고는 있다.

목성만한 행성이 모성인 별을 요동시키거나, 그 앞을 가로지르며 빛의 변화를 일으키거나, 가장 최근에는 직접 촬영됨으로써 행성들의 존재들이 드러나고는 있다. 그러나 아직껏 지구와 유사한 행성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너무 작아서 관측될 수 없거나 아예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작아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쪽에 내기를 걸고 싶다. 나는 외롭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우주는 왜 이렇게 커야 하며, 빛의 속도에는 왜 한계가 있으며 이런 류의 물음들이 나같은 호기심만 있는 사람뿐 아니라 전문 학자들 사이에서도 끊임 없이 연구되고 있다. 학자들 역시 외롭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에 그런 열정을 바치는 것이 아닐까?

생명에 목적이 있다면 결국 이 우주도 목적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생명이 있기 위해 지구 같은 행성이 있어야 하고, 이런 행성이 태어나고 유지되기 위해 태양같은 존재, 그리고 그에 앞선 별들의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주라는 무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에 목적이 있다면 우주도 동일한 목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저 사진 속 어딘가에는 우리같은 존재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고 싶다.

그 존재들은 역시나 우리와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목적 중에는 살아서는 서로 못 만나게 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호기심을 멈출 수는 없다.

사진 = http://antwrp.gsfc.nasa.gov/apod/ap061228.html

안드로메다 은하는 북쪽 하늘에서 보이고, 달은 북반구 기준으로 남쪽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니까 두 천체가 저렇게 한 눈에 보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진상 합성으로 비교하는 것인데 중요한 점은 그 스케일이 동일하게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근시 때문에 눈도 많이 나빠졌고, 대기 공해는 훨씬 심각해졌으며.. 인공 불빛들은 엄청 많아졌기 때문에 요즘은 안드로메다를 맨 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눈이 엄청 좋고, 공기가 엄청 맑아도 사진처럼 저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안드로메다 은하 중심의 밝은 핵이 희미한 별처럼 보일 뿐입니다.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안드로메다 은하는 고사하고 안드로메다 별자리나 심지어 북두칠성의 일곱별도 제대로 다 보기가 힘들죠. 이거 참 심각한 문젭니다.

공해도 심각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 중 하나인 아름다운 밤하늘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습니다.

7,80년대 어릴 때는 대도시 대구라고 해도 북쪽 하늘에서 안드로메다 은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진의 그것처럼 휘황찬란한 것은 아닙니다. (APOD 원문 사진의 설명에도 나오죠. 맨 눈으로는 은하 중심 부위만 희미하게 보일 정도라고요.)

그래도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보면, 얼추 뭔가 희뿌연한 것이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시선 크기가 저 정도일 줄은 몰랐죠. 달 보다 훨씬 작게 보인다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1:1로 비교하니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네요.


저도 암기교육 세대고, 한편 그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맨날 입으로만 달달 외웠죠. 안드로메다 은하는 200만광년 떨어져 있고 크기는 대략 10만 광년에..

달 크기도 압니다. 달은 38만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그 지름은 지구의 1/4 정도다..

지구의 크기는 둘레 4만킬로미터니까.. 등등 이런 식으로요..


저 사진을 보고서야.. 시선크기를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시선크기는 실제 크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크기입니다. 그래서 각도로 표현됩니다.

최홍만이 저보다 훨씬 크지만, 제가 만일 독자 눈 가까이 서 있고, 최홍만이 저의 한참 뒤에 서 있다면
독자 눈에는 제가 더 커 보이죠. 그게 시선크기입니다.

물론, 실생활에서는 주위에 비교 대상이 있기 때문에 최홍만이 아무리 저의 한참 뒤에 서 있다 해도.. 주위 사물 비교 등으로 원래 큰 사람은 시선크기에 상관없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주위에 비교 대상이 없는 경우는 시선크기가 사람의 인지에 압도적 영향을 줍니다.

오늘날에는 태양이 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다 알죠. 하지만, 과학적 관측 결과가 있기 전까지.. 시선 크기로만 보면 달과 태양이 똑같은 크기로 보이며, 따라서 둘 다 비슷한 크기일 것이라 느꼈을 것입니다.

 

시선크기 계산법은 간단합니다. 실제크기(길이)를 내 눈으로부터 그 물체까지의 거리로 나누면 됩니다.

즉, (달 지름 / 지구-달 거리) ~ (태양 지름 / 지구-태양 거리) 이 둘의 값은 거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달과 태양 두 천체는 사람 눈에는 아주 비슷한 크기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달이 태양을 아주 비슷한 크기로 싹 가려버리는 개기 일식 현상이 가능한 겁니다.

 

안드로메다 은하는 약 200만 광년 거리에 있는 지름 10만 광년 규모의 천체입니다. (나사 사이트에서는 250만 광년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저는 계산 편의상 200만 광년을 쓰겠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로메다 은하의 시선크기는 1/20입니다. 이 시선크기는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는 라디안(Radian)과 거의 동일한 각도 기준입니다. 라디안은 원래 직선이 아니라 원호에 대해 정의됩니다만, 작은 원호는 작은 직선과 같이 취급해도 큰 탈 없습니다.
이 안드로메다 시선크기 라디안 각을 우리가 흔히 아는 각도로 표현하면 약.. 2.9도입니다.

지평선 앞쪽과 뒤쪽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체각이 180도인데.. 안드로메다는 그 중 2.9도에 걸치는 겁니다.

180도 중 2.9도라고 해도 감이 잘 안 오실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달을 보겠습니다. 

달은 지구에서 38만km 거리에 있고, 지름은 약 3,200km입니다만.. 편의상 3,800km라 하겠습니다. 어떤 개념을 보다 쉽게 가시화하기 위해 필요한 약간의 값 조정이라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달의 시선크기는 3,800 / 380,000 = 1/100이 됩니다. (각도로는 0.6도)

안드로메다 시선크기가 1/20이니까..

안드로메다는 보름달 크기의 대략 5배 정도 되는 겁니다. (사진으로도 확인이 되죠?)

생각보다 무지 큰 존재가 우리 밤하늘에 떠 있습니다. (실제 크기는 엄청나죠. 별 천억개 이상을 담고 있는 지름 10만 광년의 천체니..)

여기서.. 안드로메다는 맨 눈으로는 저렇게 선명히 보기 어렵다는 거 다시 강조드립니다.

아무리 맑은 공기 조건이라도 .. 안드로메다 자체가 워낙 어둡습니다. 저도 어릴 때 직접 확인했지만 맨 눈으로는 사진 속 밝은 핵이.. 선명한 별이라기 보다는 그저 은하 자체의 희뿌연 중심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맨 눈으로 이 아름다운 광경을 안 그래도 보기 어려웠습니다. 빛이 워낙 약하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그 희미한 느낌마저도 거의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제 인생 큰 소원이 여럿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외계 저 어디에 또다른 지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비록 저의 직접 관측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인류만이 이 넓은 우주의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동시대 사람이 되보는 것이 소원 중 하나입니다.

천체 망원경을 질르고 싶어도.. 제대로 볼 환경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거..
우리는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환경사업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돌려줘야죠.

아내는 요즘 성당에 다닙니다.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내면의 세계 내지 절대자의 따스함을 따르고자 하는 본연의 욕구가 느껴져서 아내의 성당행에 동의 했습니다.

저는 유일신 교리 특히 기독교(여기서는 특히 구약적 사상을 말합니다.)믿음에 근본적으로 의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아직은 교회나 성당에 가지 않습니다. 아마 이 생에서는 절대로 안 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교회나 성당에서 마음의 안락을 찾는 분들에게 제가 시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다만 밝히고 싶습니다. (조심스럽습니다.. )

 

아내가 가고자 하는 구도의 길을 방해하고픈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한국 대형교회식 기독교만 아니라면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이 성당 아닌가

싶어 그것만은 크게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습니다.

 

이상하게 시작이 종교 시비처럼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마음의 안락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자기만족적 수준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적어도 자기 마음 하나 추스리고, 다른 이들을 적어도 마음으로나마 따뜻한 눈길로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어떤 절대신이 우리에게 준 숙제의 일부를 해내는 고귀한 발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절대자의 뜻에 보다 더 충실하게는 한 마음과 한 몸을 다 바쳐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겠습니다만 이건 보통 사람들로서는 정말 힘든 일이겠죠.

 

신을 믿는 분들에게는 제 생각이 굉장히 엉뚱하거나 웃기거나, 아니면 불쌍하게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과학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 가는 그 여정 자체를 좋아하고 즐깁니다.


유명한 종교인들은 대체로 각자의 종교 철학에 맞는 삶을 살아 왔습니다
.

한국 대형교회식 목사들을 뺀다면-그들 나름대로는 유명하지만서도 --; - 대다수 유명 종교인들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헌신적 삶을 살았었고,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학은 이 부분에서 종교와 많이 다릅니다.

출세를 위해 과학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과학 자체가 좋아 과학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게 중에는 파쇼주의의 선봉에 서서 과학을 이끈 유명 과학자도 꽤 있습니다. (이러면 다시 종교와 비슷해지나요? ^^)

하지만 과학이라는 학문 특히 물리와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밟아온 길을 주욱 나열해놓고 보면 그 자체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집니다. 역사가 진화해오면서 파쇼주의를 위해 과학을 하는 미친 사람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순수 과학도들 중에는 출세를 위해 과학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탓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는 새로운 사실 또는 현상들을 하나씩 밝힘으로써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 법칙을 하나씩 밝혀내고 있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종교는 머물러 있음에 반해, 과학은 적어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섣불리 말합니다. 초끈 이론이나 대통일장 이론이 완성되면 물리학의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니냐고요. 저는 뭐 그런 공론의 장에 목소리 낼 위치는 아닙니다만 한 사람의 과학 팬으로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초끈 이론이 완성된다 한들, 별들의 운행과 원자의 붕괴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 사이의 관계나 이 우주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대상입니다.

물론 그런 연구대상이 꼭 물리학자들의 차지여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이 연구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수학과 물리학은 저의 눈높이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학문이었습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므로 종교라는 사상도 하나의 학문적 테두리에서 이해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양해해주시겠죠? ^^)

 

수학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증명한 최초의 학문입니다. 그리고 물리학은 그 수학을 주요 언어로 쓰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꼭 수학만 기준 언어로 써야 한다는 법은 아직까지 없습니다만, 수학을 대체할 다른 강력한 언어가 아직 등장치 않은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물론,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신이나 해탈의 경지는 스스로 불완전할 수 없는 즉, 스스로 완전무결한 경지일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요.)

믿음 그 자체로 그 경지에 이른다거나 그 뜻에 충실할 수도 있을 것이고(종교),

논리 자체로 그 경지 근처에 얼추 다가가는 노력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과학).

 

다시 강조합니다만, 수학은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수학 자체로는 완전무결함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는 것을요. 하지만, 바로 그 증명 때문에 저는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합니다.

원래 이런 천성으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내놓고 믿기보다,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 그 논리를 따져보는 천성으로요.

하지만 지금 살아가는 이 삶, 이 순간 자체가 (회사일 때문에 주로 짜증납니다만^^) 일상 전체로서는 행복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성당에 가고 저는 여전히 과학책 들쑤십니다만, 요즘이 마냥 행복합니다.

각자 가는 길이 달라보여도 우리가 지향하는 곳은 한 곳이라고 적어도 저는 믿습니다.

저녁에 아내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당신이 보는 곳도 나와 같은 방향이냐고요.^^

 

과학이 찾는 궁극의 답은 아마 이것일지 모릅니다.

"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양자역학은 상대성이론과 아주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20세기 초반입니다.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라는 거장이 꽉 잡고 있는 반면에,

양자역학은 많은 이름들이 동시대에 왕창 등장합니다. 비유하자면..

삼국지 시대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상대성이론은 워낙 맛깔나게 깔끔하고 간결한 반면 양자역학은

파고 들어갈수록 인간의 인식체계로는 실체를 잘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신비스러움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그렇게 조각처럼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그, 리차드 파인만, 쉬뢰딩거, 폴 디락 등등..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반대방향에서

출발합니다. 상대성이론은 인간의 인지 수준보다 훨씬 큰 영역에서

시작하지요. 지구보다 훨씬 큰 태양, 절대 속도를 가지는 빛..

반면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지 수준보다 아주 작은 영역에서 출발합니다.

원자 안의 전자,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더 작은 궁극의 입자를 찾아 떠나는 여행..

 

양자역학에서 밝힌 이 우주의 가장 도깨비 같은 면이 뭐냐면 미시세계

그 아래의 입자들은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지요.

 

간단한 (그래서 실제로 많이 행해졌던) 실험을 소개합니다.

두 개의 틈을 통해 빛을 투사하면 이를 통과한 빛은 물결무늬를 만듭니다.

소위 파동의 간섭 현상입니다.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할 경우 이해는 금방 됩니다.

파동이라는 것은 중첩을 일으키게 마련이니까요.

(제가 언제 기회가 되면 기타를 가지고 파동의 중첩 현상 중 하나인 맥놀이

현상을 설명드리지요. 화음이라는 것도 결국 파동의 중첩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그런데 빛은 파동이 아니라 입자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처음 발표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도 양자역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인데.. 그가 양자역학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거.. 이거 참.. 신기합니다.)

(빛의 입자설, 소위 광양자 이론은 특수 상대성 이론과 동일시기에 발표되었습니다.)

 

파동은 사방에 퍼지는 것이고, 입자는 총알처럼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인데,

도대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그 도깨비 같은 것이 뭐냐..

이것이 바로 21세기에 이른 아직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고민하는 성질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용적 관점에서.. 그냥 그런게 있나보다 하고 실용연구나 하자

마음 먹고 일합니다. 이들이 만든 작품들은 많습니다. 트랜지스터도 이에 속합니다.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은 결국 양자역학에 크게 기대는 셈이죠.

 

빛은 원래부터 파동적 성격이 강하다고 여겨진 반면, 전자는 입자적 성격이

강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전자를 가지고 행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도

전자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줍니다. 빛과 다를 바 없이 물결무늬를 만들더라 이겁니다.

이건 마치 한 개의 전자가 온갖 가능성의 경로를 다 거치면서 입자 스스로 자신과

간섭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아니! 세상에 입자 하나가 어떻게 스스로 간섭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저도 궁금해 죽겠습니다.

바로 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립자의 양자역학적 현상들 때문에 많은 상상들이

등장했습니다. 평행우주 즉, 거시적으로는 존재를 느낄 수 없지만 소립자들은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무한 개의 평행우주 가설도 이런 현상 때문에

고안되었습니다.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표현해보기 위해 파동방정식이니 확률식이니 이런 것들이

고안되었습니다. (부평사람님도 댓글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어디까지나 모델링입니다.)

 

입자-파동 이중성 못지 않게 신기한 양자역학적 개념은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가설입니다.

빛의 속도를 넘는 현상이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듯이,

불확정성 원리를 날려버릴 수 있는 아주 높은 정확도의 위치-운동량 동시 계산은

여전히 관측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주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죠.

 

양자역학은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아주 엉뚱한 상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 및 입자-파동 이중성을 합해서 쉽게 설명하려고 나온 말이

소립자 세계는 관찰자가 개입되지 않으면 실체를 가지지 못한다.입니다.

 

이 말에서는 분명히 소립자 세계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걸 너무 쉽게 확대해석해서 거시 세계로 가지고 나오기도 합니다.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인간원리를 탄생시킨 것은 맞습니다만, 그래도 섣부른

확대해석은 조심해야 합니다.)

 

관찰자는 어떤 관찰 행위를 하기 위해 또다른 소립자(주로 광자나 전자)

관찰 대상에 교란을 일으켜봐야 합니다. 교란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관찰 대상은

뚜렷한 실체(운동량이라던가 위치 등등)가 결정되지 않은 것이지요.

소립자 세계의 이 사실만을 아무 고민없이 거시적으로 확대하면

저 먼 우주 어느 세상도 인간이 관찰하지 않으면 객관성 내지 실체가 없는 것

아니냐 .. 이런 억측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시적 세계는 분명히 실체와 객관성을 가집니다.

세상의 근원은 양자역학적 미시 현상을 가지는데 이것들이 모인 거시세계는

뚜렷이 객관성을 가지는 겁니다. 그 경계가 어디냐 자체가 과학적 연구대상입니다.

미시 세계에는 존재 의미가 없던 엔트로피적 현상이 거시세계가 되면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저는 석가모니 스승님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질량 등가식이나 아니면 양자역학적 불확정성 세계를 말한 것이

일단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스승님은 뭔가 다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우주의 크기는 약 150억광년이다. 난 사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정확한 뜻을 아직 잘 모른다. 우주의 나이도 150억년임을 감안할 때, 이 우주의 크기가 태초 빅뱅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도(?) 실제 우주의 범위가 150억년인지를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쉽게 생각해서 우주의 크기가 어쨌거나 150억 광년 범위라고 보자.

우주에는 우리 은하와 비슷한 은하들이 대략 천억개가 있으며 그 크기 역시 대체로 지름 10만광년 정도다. 150억년 대 10만년의 크기가 되는 것이며 그 비율은 15만배다.

은하 하나를 탁구공만하다고 보면 우주의 크기는 5km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탁구공 은하들은 서로 평균 1미터 정도씩 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우주를 절대로 지름 5km 크기의 공간 또는 공 같은 것으로 상상하면 안 된다. 지름 5km의 공을 상상하는 순간 당신은 공간 속에 들어 있는 또다른 공간인 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공간 그 자체다. 다만 비유적으로 탁구공(은하)과 지름 5km 크기의 공간(우주)과, 1미터의 탁구공간 거리를 들었을 뿐이다. 한편, 은하들은 우주에 골고루 분포하지 않는다. 은하들은 중력적으로 서로 뭉쳐 있다. 이들이 은하단, 그리고 초은하단을 이루며 은하단과 초은하단 사이에는 거대한 빈 공간들이 있다.

다만 우주의 크기를 상상한다는 측면에서 탁구공들이 평균 1미터씩 떨어진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한편 탁구공을 잠실 농구장 만하게 확대시켜 본다면 그 때 잠실 농구장 안을 돌아다니는 원자 한 개가 우리 태양에 해당한다. 우주는 무지무지하게 크다.

이 빈 공간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암흑 에너지로 부를 뿐이며, 이 암흑 에너지는 중력과는 반대로 물질들 사이에서 서로 밀어내는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소리 압축이나 이미지 압축은 사람의 인지 능력의 한계를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소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좀 간다. 예를 들자면 가청 주파수 범위 바깥에 있는 소리의 진동에 해당하는 20Hz 이하나 20,000Hz 이상은 제거해버려도 감상에 별 지장이 없다. (아주 예민한 사람은 몸으로 진동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같은 대다수 평범한 귀에는 가청 주파수 바깥은 이미 별 의미가 없다.)

즉, 평균적 인간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범위의 정보는 없애버림으로써 압축률을 높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mp3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압축기술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인지 범위 내에서도 뭉테기로 뭔가를 뚝뚝 떼내버린다고 한다. 나로서는 아직까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압축 기술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사실 긴가민가했었다. 인지범위 바깥을 없앤다는 정도야 이해가 갔지만 인지 범위 내의 것을 왕창 날리는데도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니. 뭔가 좀 당하는 기분도 들고 속는 기분도 들고.. ^^;

어느날 우연히 아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A와 B가 똑같은 색깔이라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떤 사람은 친절하게도 B의 일부를 포토샵으로 여러번 복사해서 연속적으로 A로 이르는 증거그림까지 올렸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서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래 그림을 직접 만들어보았다. 내 손으로 직접 해보고서야 믿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인식의 수준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위 그림에서 편의상 글자는 지웠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첫번째 그림으로 직접 작업해보시기 바란다.^^;

'인지' 또는 '인식'이라는 것은 훈련의 결과다. 나는 기하학적 착시에는 꽤나 강한 편이다. 반면, 위와 같은 색깔과 관련한 착시에는 속수무책이다. ^^;

위의 그림은 그나마 흑백의 구분 정도지만, 언젠가 한번은 색채와 관련한 착시에도 완전히 놀라 자빠진 적이 있다. 우연히 봤었는데.. 그 그림을 다시 찾게 된다면 여기 소개토록 하겠다.

우리는 이 우주 한 켠에 각각 태어난다.
삶에 묻혀 살아간다.
살아가다, 그리고 죽어갈 때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 한다.

우주 저 편을 건너보며,
비록 지금 바로 이 같은 순간을 향유할 수는 없지만,
이 공간 속에서 같이 살아 있음을,
이 공간 속에서 같이 살았음을 애틋하게 서로 그리워한다.

우리는 별에서 왔다.
별이 태어나 화려한 광채를 뽐낸다. 하지만 그 빛을 바라볼 존재가 없다면 그 빛은 의미가 없다.
별은 죽으면서 자신의 재를 우주에 흩뿌린다.
그 재로부터 또다른 별이 태어나고, 별에 딸린 작은 대지가 태어난다.
그 대지 위에서 생명의 싹이 트고, 그 생명 중의 일부는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지성을 가꾼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주 저 편에 또다른 누군가 있는 것이지 궁금해하고, 그리워한다.

별 빛 속으로 돌아가는 길.
우주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그 길을 우리 모두 한 걸음씩 밟아가고 있다.

우리 은하는 지름 약 10만 광년 정도된다. 태양은 지구 지름의 109배 정도인 지름 139만km를 가지는 천체다. 지름 10만 광년과 지름 139만km는 너무나 큰 차이기 때문에 선뜻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은하는 빛의 속도로 가로질러도 10만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는 반면, 빛의 속도로 태양 지름을 가로지른다면 약 4.6초 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은하와 태양은 10만년 대 4.6초의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도 크기 비교가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번 시도해보자.

태양의 크기를 원자의 크기로 축소시켰다고 보자. 원자의 크기(지름)는 0.1nm(나노미터)로 대표할 수 있다. 0.1nm는 너무 작아서 눈에 떠올리기 힘든 크기다. 일단 원자의 크기를 눈에 그려보자. 지구의 크기는 안다. 둘레가 40,000km인 구체다. 지구를 탁구공만하게 볼 수 있는 거리로 멀리 나가거나, 아예 탁구공만하게 축소시켰다고 상상하자. 이 때, 탁구공 만한 지구 위에 사는 아주 자그마한 내가 들고 있는 탁구공이 바로 원자의 크기다. 즉, 지구와 탁구공의 크기 비율은 탁구공과 원자 크기 비율과 같은 것이다.

이제 태양을 원자 크기만큼 축소시켰다. 그러면 우리 은하는 지름 70미터 가량 되는 납작한 호떡에 비유될 수 있다. 지름 70미터 호떡은 너무 커서 비유가 어색하다. 여기에 비견할 만한 시설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중석을 제대로 갖춘 농구장이다. 대표적으로 잠실 농구장을 떠올리면 되겠다.

우리 은하에는 (다른 은하도 대체로 그렇다.) 대략 천억개의 별들이 있다. 즉, 잠실 농구장만한 은하 안에 원자 천억개가 나름대로 질서 정연하게 모여서 돌고 있는 것이다. 천억개라는 것은 얼핏 무척 큰 숫자지만 원자 크기만한 별 천억개가 잠실 농구장 공간 안에 퍼져 있다면 이건 사실 텅 비었다고 봐도 무방한 정도다.

0°C, 1기압 조건의 공기 1mm3 부피에는 2.688x1016개의 공기 분자가 들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숨쉬는 공기 1입방밀리미터에는 천억개의 26만8천8백배에 해당하는 갯수만큼의 공기 분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실 농구장에 원자 천억개가 있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기준으로 보면 진공이나 마찬가지다.

어쨌든, 잠실 농구장(지름 70미터) 안에 든 천억개의 원자(별)들은 평균적으로 거리가 6mm 정도 떨어져 있다. 원자 두 개가 6mm 떨어진 모습은 탁구공 두 개가 거리 2천2백km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텅 빈 것과 마찬가지인 은하 두 개가 서로 부딪힐 때 그 내부의 별들끼리는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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