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출처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79302
이글 썼던 시점 = 2008년 4월16일.
이글 옮긴 시점 = 2009년 6월 5일. 안타까운 마음이 여전히 나를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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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라기보다 사실 하나.

이 땅에 보수는 없다. 보수라 자칭하는 수구가 득시글거릴 뿐.

사실 수구라는 용어도 아깝다. 수구라기보다 매국노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일단 꾹 참고 수구라는 용어를 써주자.

수구는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현대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수구는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진보의 탈도 쓴다. 수구는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그나마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가치관을 확 바꿔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영달을 위해 명예도 내동댕이치는 모습을 이번 총선에서도 보여주었다.

수구는 생존본능이 매우 강하다. 즉, 수구는 유연성이 매우 강하다. 즉, 수구는 이익을 위해 그 나름의 대의를 희생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줄 안다. 똑똑해서라기보다 욕망이 워낙 강렬해서 그렇다. 양심 가진 사람은 함부로 못하는 짓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존 능력 그리고 나아가 강한 출세욕을 본받고 싶기까지 하다.

한편, 자칭 진보라 하는 사람들도 수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개혁에 성공할 수도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지난 5년, 그들은 수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들에 태클을 넘어 보디체크해댔다.

단, 진보가 수구와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수구는 개인의 영달 또는 이익을 위해 발목을 걸지만, 진보는 대의가 아닌 소의에 집착하느라 발목을 건 것이다.

진보의 눈으로 보기에 FTA나 해외 파병은 분명 반대 사안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 자신도 이 두 개 정책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소의 두 가지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등에 칼 꽂는 짓은 안 했다. 하지만, 진보는 칼을 꽂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무늬만 진보라 부르거나 멍청한 진보라 놀린다.

FTA는 분명히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까운 정책이다. 해외 파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몇 개 사안에 대해 나와 견해가 다르다 해서 나는 섣불리 노무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나는 그의 대의를 느꼈고 나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의는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1%가 쥐락펴락하는 이상한 민주주의도 아니고, 국회로 대변되는 대의민주주의도 아니고 민중 전체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민중이라는 용어가 나와서 말인데, 진보의 치명적인 실수는 1%를 민중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민중에는 그 1%도 다 포함되는 것이다. 이건희 씨도 한 표고 나도 한 표다. 민중민주주의에서는 이건희 씨의 한 표가 나의 한 표보다 그다지 더러울 것도 없고, 그다지 초월적일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 주위 일부 1% 지인들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완전 적군으로 규정하고 이를 갈더라만, 내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1%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양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준법을 요구했을 뿐이다. 불법과 탈법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준법을 요구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1%들 그리고 그들의 개들인 조중동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좌파니 뭐니 이상한 딱지를 붙이고는 적군으로 규정해버렸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정작 보수적 정치인인데도 말이다.

수구는 개인의 영달을 민중의 이익으로 사탕발림하는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 이 역시 나는 개인적으로는 배우고 싶다. 고려시대 신돈이 울고 갈 재주다.

하지만, 진보는 소의에 집착하느라 대의를 보지 못하고, 그나마 정작 자신들의 편이어야 할 최소 50% 가까운 민중들의 소중한 표를 전혀 흡수하지 못한다.

진보는 소위 말해 적전 분열을 잘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진보의 한계다. 나의 학창 시절, 주위 운동권 친구들이 보여주던 그 치열한(?) 논쟁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목표는 독재타도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의 실현일진데, 왜 뜬금없이 주사파니 아니니 이런 걸 가지고 서로 싸우고 치고받고 분열되고….

열린우리당이 해온 행적들을 보라. 지난 몇 년 민노당이 해온 행적들을 보라. 그들은 대의가 무엇인지는 까맣게 잊고 그저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면 딴나라당 못지않을 폐해를 우리에게 끼쳐 버렸다.

지나간 버스에 손 흔드는 셈이지만,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합당이라는 뜻으로가 아니라 정략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뭉쳤어야 했다. 오직 1% 수구를 위해 살아가는 딴나라와 조중동을 1차 박멸 대상으로 삼고 이 두 개 암세포를 제거한 후에 그들은 각각 보수와 진보로 갈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의가 아니라 소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것에 부연을 달아야겠다. 나는 딴나라 관련자 개개인, 조중동 종업원 개개인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각 개인은 엄연히 우리와 같은 민중이다. 생각이 해괴망측해서 그렇지, 엄연히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집단으로 있는 한, 그 집단 자체는 반드시 박멸의 대상이어야 한다. 왜냐? 애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집단이니 유가 아닌 무로 되돌려야 한다는 뜻에서다.

이 단순한 목표와 대의를 왜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의원 나리들은 몰랐을까? 민노당의 오묘한 정신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음알음 들어본바 열린우리당의 정신세계는 단순했다. 그들에게는 다음번 금배지가 대의보다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다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수구라 불려 마땅하다.

이번 버스는 우리가 놓쳤다. 나 자신 경상도 출신이지만 내 고향 욕해봐야 별 소득도 없다. 친구들만 떨어져 나갈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현직에서 물러났다. 내 욕심으로야 그분이 다시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지만, 설사 그분의 개인적 뜻이 이제는 은퇴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 한들 그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그는 그만의 세계와 삶이 있기 때문이다.

수구들은 절대로 적전 분열을 하지 않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진보는 지금까지 으레 그랬듯이 앞으로도 또 적전분열을 할 것처럼 불안 불안해 보인다.

진보의 가치를 다시 가슴 속에 새겼으면 좋겠다. 진보란 대의를 완성하는 길로 가는 그 자체에 뜻을 두어야지,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 생각하거나 엉뚱한 소의에 집착하면 그건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떡고물에 집착한다면 진보의 탈을 쓴 수구고, 소의에 집착하면 멍청한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수구의 개밥그릇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진보의 사탕적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민중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해봐야 대다수 민중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수구의 개밥그릇에 해당할 진보의 사탕을 찾아내는 것이 진보의 대의를 완성하는 첫 번째 전술이 될 것이다.

나는 답이 없다. --;


사족) 조중동 신문기사 좀 퍼오지 말기를. 개를 키워보면 안다. 개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주인의 미움이 아니라 주인의 무관심이다. 주인이 개를 미워할 경우 적어도 밥은 준다. 하지만, 개에게 무관심해지면 결국 개는 굶어 죽는다. 조중동은 쳐다보지도 말자.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 몇 명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글이다.
글을 올린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계셔서 행복할 때였다. 아래 글을 원래 카페에서 옮기면서 이모티콘 같은 것은 생략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가슴에 다시 돌아 오셨지만, 그래도 아직은 행복하게 맞이할 때는 아닌 것이다. 아직은 그의 물리적 부재가 내 눈에 눈물을 솟아 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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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2일 새벽의 꿈 이야기.

요즘에는 일손이 잘 안 잡힌다. 자리에 앉아서 집중이 잘 안 된다는 얘기다. 정권이 바뀐 이후 특히 심해진 증상이다. 내가 나라 걱정 한다고 나라 운명이 좌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뽑아도 정말 잘못 뽑았다. 민주주의 투표로 결정된 것이니 뽑힌 놈을 탓하기 보다는 뽑은 놈들을 먼저 욕해야 할 것이다.

내게 있어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진행형이다. 대통령의 자리에 걸맞는 철학자로서 존경한다. 그토록 욕을 먹으면서도 우직하게 원칙을 고수한 그 뚝심과 배포를 본받고 싶고 존경한다. 

이명박에 대한 우려와 염증, 그리고 떠난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둘이 동시에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의 계시성 또는 예지몽이라는 그런 현상은 믿지 않는다. 다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신기했던 것은 큰 아이 잉태 당시 아빠인 내가 꾸었던 태몽이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한번의 더 신기한 꿈을 꾸기는 했는데 그 꿈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대체로 서양과학의 한 계통인 심리학에서 말하는 꿈 이론을 믿는 편이다. 잡다한 일상의 경험이 무의식 저장고로 들어가는 와중에 나타나는 잡음 비슷한 것.

어쨌든, 나는 이명박과 노무현 대통령이 동시에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이명박 옆 또는 뒤에 앉아 있었다. 어떤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싫어함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비록 꿈 속일지라도, 나는 떨었고 긴장했다. 내 가슴 속 한 켠에 독재 시절의 공포 또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알랑방구 근성이 살아 있는지 모를 일이다.

꿈에서는 장면이 확확 바뀌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래서 꿈이란 일종의 잡음 현상일지도 모른다.

장면이 바뀌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했다. 꿈 속에서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그는 전 대통령이었고 이명박은 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노무현은 여전히 대통령이고 이명박은 그냥 이명박일 뿐이다. 

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이 같이 길을 걸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허름한 동네였다. 길 포장도 없었고 질척거리는 골목길이었다. 수행원 한 명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슨 신분으로 그들 뒤를 따라갔는지 몰라도 여하튼 나까지 총 네 명이 그 어둡고 질척거리는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꿈 속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경호원도 없이 이렇게 노출되서 걸어도 되나 걱정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이 나눈 대화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냥 두리뭉실한 얘기였다. 노 대통령은 그냥 덕담 같은 것을 던졌고, 이명박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준이었다. 

꿈의 막바지에, 정말 질척거리면서 시커멓게 지저분한 길을 만났다. 꿈 속에서 내 신분이 뭐였는지 모르지만 뒤 따라가는 나 조차도 꺼리는 길을 노무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이명박은 그저 그냥 평범하게 따라간 것 같고, 나는 구두는 어쩔 수 없더라도 양복 바지 만큼은 그 더러운 시궁창에 가까운 흙탕에 버리지 않으려고 바지를 바짝 끌어 올렸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그저 당당히 앞을 걸었다.

시궁창 흙탕길을 벗어나 무슨 언덕 같은 곳에 이르렀다. 언덕 아래에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범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괴한이 한 여성을 납치하는 장면이었다. (잠재 기억으로 재편되는 과정의 잡음이라는 측면에서 꿈을 보자면, 이 장면은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의 범죄 뉴스가 내 기억 속에서 정리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레 넘어간다. 순식간에 나는 경호원이 되어 있었다. 나는 범죄 현장을 보면서 경호원 본연의 자세가 되어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에게 빨리 몸을 숨길 것을 지시(?)했다. 꿈 속에서는 비록 경호원의 신분임에도, 실제로는 그런 일 한번도 겪지도 그리고 경호라는 일 근처도 안 가본 입장이어 그런지 몰라도 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꿈을 깨고 다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이어지는 꿈이었는지 몰라도.. 

꿈의 마지막에서 밝혀진 바, 그 범죄 현장은 실은 범죄 현장이 아니라 어떤 철없는 젊은 여성 운전자가 대통령 동선에 차를 주차했고, 그 때문에 경호 인력들에게 연행되는 현장이었다. (실제 세계에서 이게 말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본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대체로 보면 평범한 개꿈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시궁창길을 묵묵히 당당히 걸어가던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비록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찝찝하지만 그를 따라가던 나. 여기에 무슨 상징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3월15일 새벽..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처음 알게 된 1988년 청문회 이래, 그를 열광 지지하던 (물론 지금도 전폭 지지) 지난 몇 년의 세월 포함하여 20년이 되도록 꿈에서 본 적이 없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한 주 동안 내리 두 번 꿈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두번째 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봉하마을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내 옆에는 비서관이 앉아 있었는데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꿈의 끝에서 나중에 나와 소주 한 잔 하기로 했는데..

두번째 꿈에서 그래도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은 노무현 대통령과 그 자리의 여럿이 (물론 꿈속의 나 포함) 주먹을 서로 맞대고 뭔가 다짐을.. 거창한 다짐이라기 보다 뭔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의 소박한 다짐을 했는데 .. 이 휘발성 기억으로 인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 주 동안 두 번이나 노무현 대통령을 꿈 속에서 보았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소위 말해 돼지꿈을 꾼 기분이었다. 물론 첫번째 꿈에서는 복돼지(노무현 대통령) 말고 사람돼지도 나온다.


- 진흙탕을 묵묵히 걷던 노무현 대통령,

- 퇴임 후의 식사 자리에서 무언가를 다짐하던 노무현 대통령,

꿈 속의 이 두 장면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싶다. 이 따위 나라 떠나버리고 싶다는 내 마음을 달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예지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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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7일에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꿈 이야기.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물리적 육체로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아직도 그리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위대한 불길이 되어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세대가 늙어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평안히 쉬세요. 노무현 대통령님.

내 가슴에 다시 찾아 오셔서 반갑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다. 삐딱하게 보면 매우 자본주의적이고 성공지향적인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씹어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고 당연히 맞는 말이다.

 

교육은 중요하다. 내 후손의 후손들이 잘 살기 위해서? 오로지 우리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이 최강의 집단이 되어 남들 등쳐 먹고 살기 위해서? 물론 그런 뜻으로 저 귀한 말을 써먹는 못된 놈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교육은 한 인간의 완성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위한 토대이기 때문에 백년을 내다보는 마음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교육은 중요하다. 입시 시험 잘 봐서 명문대 가고, 고시 잘 봐서 전문직종 자격증 따기 위해 중요한 사항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고귀할 수밖에 없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교육이 중요하고,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외롭고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다.

 

대학부터라면 몰라도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평등한 교육기회가 모든 사회 구성원 즉, 민중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이란 너도 나도 똑같은 성적 받기라는 몰상식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다.

 

미리 말하자면, 내 주장의 핵심은 사교육 전면 금지시키고 공교육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 아주 간단하다. 사교육을 엄격히 단속/처벌하면서 공교육 교직원 수입을 고소득 직종의 것으로 만들어주면 된다.

구미 선진국들의 교직원 수입이 별로 높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질투 어린 주장은 그만 입 다물어 주기 바란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기준이 있으면 되지, 왜 편할 때마다 구미 선진국의 별 희한한 것까지 다 따라 해야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 선생님 아니다. 교직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내 아내? 가정주부이고, 교직을 한 때 생각한 적 있지만, 이제 나이로 보나 여러 조건으로 봐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내 일가 친척? 생각나는 모든 일가 친척의 직업을 떠올려 볼 때 사촌 형수 한 분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설마 내가 주위 일가 친척 중 사촌 형수 한 분의 장래 수입 걱정 때문에 교직원 수입 팍 올려주자고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왜곡된 정신의 소유자가 없기를 바란다.

 

고등학교까지의 공교육 종사자들 연봉을 일류 대기업 직원 수준으로 확 올려야 한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로 교직원 연금 제도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 결론적으로 선생님 되는 것이 대기업 직원 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나라 공교육이 살아난다. 교직원이 인기 직종이 되면 당연히 우수 자원이 몰려들 수밖에 없고, 사회적 우수 자원이 어린 아이들 교육을 맡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환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경제 활동을 할 즈음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 되지 말라고 해도 이미 최강의 선진국에 진입해 있을 것이다.

 

우수 자원이 너무 선생님만 지원하면 곤란하다고? 글쎄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고소득 전문직이라 불리는 변호사, 의사, 변리사 등등 그런 직업 다 합한 숫자와 초중고 선생님들 다 합한 숫자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고 검색해볼 의향도 없다. 중요한 것은 머리 똑똑한 우수 자원이 변호사나 의사 하는 것 보다는 선생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이다.

 

변호사나 의사를 천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직업 역시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변호사와 의사는 그 직업의 본질을 볼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지 대단히 뛰어난 두뇌가 결코 선행 조건이 아니다. 변호사란 원래 억울한 사람을 대하고 보하는 것이 그 직업의 본질적 존재 이유 아닌가? 가진 사람 내지 가지고자 하는 사람의 이권을 대변하는 직업은 말 그대로 번역하면 변리사지 변호사가 아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원 수료하면 변호사 자격 외에 따라붙는 여러 추가 자격증이 있고 그 플러스 알파 중에는 변리사 자격도 있다고 한다. 이 줏어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참 개탄스러울 정도로 무소불위적인 사법시험 제도가 아닐 수 없다. 판검변이 동시에 나오는 시험에 덧붙여 변리사 자격증이라니! 최고 우선순위 개혁 대상이다. 여기서 또 첨언. 나 변리사 아니다. 시험치기도 너무 늦었고, 일가 친척 중에는 아무도 없다.)

 

의사도 마찬가지. 의사라는 직업 구성 요건의 우선 순위는; 사람에 대한 사랑 >> 오랜 시간의 경험 > 손기술 > 제반 지식이다.

의사라는 직업 구성 요건을 위와 같이 확실히 결론짓게 만드는 최근의 일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 큰 아들의 맹장 수술 건이다. 맹장이라는, 나 같은 문외한의 피상적 지식으로는 그 확실한 증상을 두고 종합병원 의사들은 이틀 간이나 고민을 했다. 이 말은 결코 내가 의사를 무시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의사들이 이틀간이나 고민한 것이다. 돈벌이 때문에 함부로 사람 몸 우선 찍찍 찢어발겨놓고 보던 시대는 지났다. (큰 녀석 생후 2개월 때 병원 응급실에서 그 의사 새끼의 씨불거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 애 배를 열어봐야 알죠.” 사람 몸이 자동차 보닛도 아니고 허 참 새끼스러운 의사 새끼였다.)

 

모든 생명이 무릇 다 그렇겠지만, 특정 생명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는 특히 더 신비스럽고 오묘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므로 배 아프다고 울상 짓는 큰 아이를 두고 의사들은 심사숙고 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심사숙고 자체가 더 고마웠던 것이다. 맹장염 하나를 두고 그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보여주는 그 화려한(?) 증상들이 의학 서적 만권 읽어 외운다고 제까닥 나올 수가 없다는 증거다. 따라서 의사라는 직업에는 사랑과 경험이 지식에 많이 우선하는 것이다.

 

, 그리고 변호사는 잘 몰라도 의사도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이어야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결정적 순간에 사람 목숨을 다루는 직업 아닌가.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돈이라는 형태로 보상되어야 마땅하다. (또 첨언. 나는 의사가 아니며 내 일가 친척 중에도 의사가 없다. 참으로 평범 그 자체인 집안이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변호사나 의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만 크다면 내 아이가 덜 떨어진 이상주의자가 될지 모른다. 머리만 똑똑하다면 내 아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출세 지향적인 놈이 될지도 모른다. (정의를 빙자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일부 이익 집단들을 우리는 지금 생중계로 보고 있다. 사실 그 직업군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엄정한 객관성이다. 정의를 우선 순위에 두게 되면 지금 우리가 똑똑히 보는 것처럼 불의와 탐욕을 정의라고 지 맘대로 정의하는 볼썽 사나운 꼬라지를 맞이하게 된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똑똑함과 사랑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도 당연히 많은 직업이다. 소위 초딩이라고 불리는 요즘 애들. 한 마디로 굉장한 녀석들이 꽤 있다. 나 개인적으로 모 초등학교에서 자원 봉사할 때 정말이지 애새끼 대가리를 콱~!’이라는 소리가 목구멍 직전까지 올라오게 만든 놈들 많았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대단한 스트레스 면역성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님은 내 아이를 상당 시간 가르치고 길러주는 분이다.

 

학원? 이건 사설이고 사교육이다. 학원? 나도 큰 아이 보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기 싫어하는 녀석 내가 억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다 하니 나는 그냥 학원비를 지원해줄 뿐이다. 제 발로 가다니 기특한 녀석이라고? 절대로! 나는 내 아이가 기특하다기 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몇 발을 앞서 간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녀석이, 지 진로를 생각해보고 이것 저것 알아보더니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학원엘 가야겠다고.

 

아이의 현재 꿈은 천체물리학자다. 나는 틈나면 말한다. 천체물리학자 되는 자격에 과학고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하지만 아이는 확고부동하다. 자기 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고에 가야 한다고. 아이의 이 확고부동함에 논리는 없다. 다만 이 비뚤어진 입시 풍토가 아이를 그렇게 세뇌시킨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되려면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려면 특목고 가야 하고, 특목고 중에는 과학고가 제일 좋고. (내 지금 솔직한 마음은 특목고를 당장 다 때려부수는 것이다. 특목고 학생들, 미안하다. 이 애비 마음 너희들이 학부모 되면 알 거다.)

? 한국 사람이다. 한국 부모다. 과학고 가고 싶어 제 발로 학원엘 가겠다는데 그걸 굳이 뜯어 말릴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다. 아니 생각은 자주 하지만 실행에는 절대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부모니까.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 은근히, ‘나는 과학고 학생 학부모다.’라는 자랑을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지 나도 모른다.

 

어느 일본 사람이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봤다. 그 중에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한국 경제 살린다고 강이니 운하니 이런 삽질만 할 생각 말고 사교육을 당장 전면 폐지하라고. 그러면 사교육에 들어가는 돈이 자연스레 내수 경제 활성화에 쓰인다고. 사교육에 쓰이는 돈은 결코 생산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지극히 쉬우면서도 당연한 말이다. 소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 왜 도대체 사교육을 이렇게 그냥 손 놓고 쳐다보고만 있는지 참 답답하다. 하기야 어떤 사람은 공교육 자리를 노리면서 사교육의 돈도 빌렸다지. 그 정신 세계가 참 궁금하다.

 

아이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가끔 보노라면, 학원 교육의 폐해를 절실히 느낀다. 아이는 수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풀이를 하는 것이고 정답 맞히기 경주를 하는 것이다. 수학의 아름다움을 음미해야 마땅할 나이에, 문제 풀이기 경주에 내몰리고 있고, 학원에서는 열심히 오로지 문제 푸는 요령만을 가르치고 있다. 위에 말한 일본 노신사의 말마따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본질적으로 생산적일 수가 없는 이 미친 게임에 나도 돈을 쏟아 붓고 있는 이 현실이 참으로 밉다.

 

그래서 나는 공교육 선생님들의 대폭적인 연봉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세금 증가? 나는 기꺼이 부담할 것이다. 삽질하자고 내 주머니에서 빼앗는 돈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아름답게 가르치라고 선생님께 드리는 대가이므로 나는 흔쾌히 내겠다는 것이다.

 

선생님들 연봉을 대폭 인상하면 초반에는 몇 가지 역풍이 있을 것이다. 우선, 현재 교사직에 있는 선생님들. 이 양반들 사실 작은 로또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력 들이지 않고 거저 먹는 셈이기 때문이다. 표현이 과격하다고 느끼는가? 과격한 표현에 앞서 당근 자체가 더 달콤하지 않나? 이런 로또에 대해 당연히 선생님이 아닌 직군 종사자, 즉 내가 포함되는 바로 그 선생 아닌직업군의 불만은 당장 불거져 나올 것이지만 할 수 없다. 이런 일시적 갈등은 참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냥 뭐, 지금 당장 선생 직업 가진 친구들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술 얻어 먹는 것으로 참아 넘기는 수밖에 없다.

 

한편 사교육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면 몇 명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당장 사설 학원 선생들의 직업이 끊기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소정의 평가 단계를 거쳐 공교육계로 흡수하면 된다. 이 평가 단계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길 텐데 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그릇이었다면 애초 사교육 분야에서도 종사하지 않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사자들로서야 당장 직업이 끊기니 불만이 엄청나겠지만.

그런 불만에는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시대의 변화에 의해 사라지는 직업의 예는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버스 안내양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여객기 항법사나 기관사도 마찬가지 예다. 전투기 조종사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직업이다. 무인 전투기들의 등장을 보면 미래가 뻔히 보인다. 이런 예들에 따라, 사교육을 전면 금지하자는 내 주장이 실현될 경우, 직업을 잃게 될 학원 선생들께는 보다 큰 틀의 차원에서 이해를 부탁 드리는 바다.

 

무릇 모든 개혁에는 약간의 퇴로는 열려 있어야 한다. 탈출구로서의 퇴로든, 퇴행으로서의 퇴로든 말이다. 스스로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숨 쉴 구멍 즉, 이 경우에서는 고급 사립학교라는 기회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략 인구 백만명 당 약 100명의 한 학년 정원 정도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초중고 총 12년을 합하면 인구 백만명 당 1200명의 고급 기회 내지 맘껏 돈 쓸 기회 또는 돈 자랑 할 기회는 열어주자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대략 5천만이므로 전국적으로 50개씩의 초중고 고급 사립학교를 열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립이므로 학비를 얼마를 받건 그건 그 학교의 재량으로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 선발을 실력으로 뽑건, 경매로 뽑건 그것 역시 학교의 재량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F4 왕자님과 그 부모들의 욕망 배출구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 방식이 실현되면 한 해에 5천명의 특권층 자제들이 대학 진학 기회에서 다른 공교육 출신 및 검정고시 출신들과 겨루게 될 것이다. 대학 입학 기준이 매우 객관적이고 엄격한 한, 매우 특수한 교육을 받아 매우 뛰어난 객관적 실력을 갖춘 학생이 자기 입맛대로 가고 싶은 대학 골라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실력으로 인정해야 한다.

 

특수 고급 사립 교육을 받은 5천명의 학생 모두가 공교육 출신 학생들을 압도적으로 앞설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게 겁나서 그런 사립 기회조차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매우 못나고 왜곡된 공산주의적 사고 방식에 물든 것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특수 교육을 한들 저 5천명 중에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학생들은 암만 후하게 잡아도 5백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45백명의 실력은 공교육 출신의 우수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다.

 

부모 잘 만나 최고의 사립 학교에서 고급 교육을 받고 대단한 실력을 갖춘 아무리 후하게 잡아 5백명 남짓의 학생. 그 정도는 우리가 경쟁의 우위에 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다. 그마저도 인정 못하면 그건 정말이지 못난이 물귀신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대학 입학에 관한 한 정원 외 기부제 입학(, 사립대만)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립대학 당 한 학년에 학과당 2명 정도는 기부제 입학을 허용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충분히 성숙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시나리오를 보자. 부모 잘 만나, 특수 사립 초중고를 거치게 되는 한 학생. 그런데 애가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논다. 더구나 성격도 더럽다. 한 마디로 눈꼴 시다. 그런데 이 녀석이 부모 돈으로 한국 최고 사립대에 기부 입학을 한다. 그런데 얘 적성이 그 학과에 딱 맞아서 거기서 드디어 숨겨진 재능을 발휘해서 학과 수석 졸업하고 그 이후 승승장구한다. 여전히 성격은 더럽다.

 

, 가만 생각해보자. 이런 아이가 기부 입학해서 수석 졸업했다면 그건 기부 입학제의 폐해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이런 아이 때문에 기부 입학의 폐해를 운운하고 절대 불가 방침을 말한다면 그 역시 못난 물귀신이요, 비뚤어진 공산주의자일 따름이다.

확률적으로 봐서, 그냥 놀다가 기부 입학한 아이가 과 수석을 차지할 가능성은 매우 낫다. 졸업이나 제대로 하면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 교수가 부잣집 또는 권력층 아이 협박 때문에 또는 미리 눈치 봐서 학점 후하게 주는 꼬라지는 절대적으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이런 덜떨어진 사례는 이 글에서는 더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이 적성이 드디어 맞아서 능력을 꽃피웠다면 그건 박수 쳐줄 일이지 결코 욕할 일이 못된다. 또한 뒤늦게 적성과 전공의 궁합이 그렇게 잘 맞았다면, 그건 대학 당국의 선발 능력을 탓할 일이지 결코 그 아이 또는 기부 입학의 폐해를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이제 정리하자.

 

사교육은 당장 전면 폐지

공교육 선생님들 연봉 대폭 인상. 일류 대기업 수준 또는 그 이상

인구 백만명 당 한 학년 정원 100명 수준의 사립학교 허가

사립 대학 기부 입학제 허가 (많이 잡아서 학과 정원 당 2명 정도)

 

우리 큰 아이는 이미 늦은 시기에 들어가겠지만, 둘째라도 제발 좀 정상적인 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환경에서 자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을 필요가 있다. 국가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세금을 냄으로써 사회의 일원이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세금 내는 것을 아주 떫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세금을 내고 싶을 정도로 직업과 안정된 소득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최저소득 계층에게도 1% 정도의 소득세를 매김이 옳다. 일방적인 수혜자라는 위치보다는 작으나마 나도 사회에 일조를 한다는 보람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은 세상을 로그적으로 인식한다. 소리를 그렇게 듣고, 빛도 그렇게 감지한다. 자기가 벌어 들이는 소득, 그리고 쌓아 놓은 재산에 대해서도 분명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의 세제는 누진세 방식이다. 저소득에서 고소득으로 갈수록 세율이 높아진다. 그런데 문제는 세율이 올라가다가 어느 선에서 멈춰버린다는데 있다.
탐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증가하다 멈추는 현재 누진세 개념이 아니라 세율이 계속 증가하는 로그적 방식이 도입 되어야 한다.

즉, 총수입에서 세금을 제하고 얻는 순수입이 로그적이어야 한다. 그래도 소득에 따른 계층 분화는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경쟁 원리도 그대로 살아 있다.

총수입 A를 봤을 때 순수입 함수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순수입 = k * 총수입^x

x는 1 이하의 수여야 한다. 1인 경우 세금이 없는 셈이다.
k는 x의 값에 따라 변동한다. 최저소득 계층이 99% 정도의 순수입을 얻도록 즉, 1%의 세금을 낼 수 있도록 조절된다.

따라서 세금은 다음과 같이 된다.

세금 = 총수입 - 순수입 = 총수입 * (1 - k * 총수입^(x-1))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기존 누진세 개념을 초과하는 즉, 부유층으로 갈수록 세부담이 점점 가중되는 결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런 항구적 누진세 개념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자의 욕심에 귀기울이기 보다 저소득층의 삶의 질 향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류 복지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항구적 누진세를 적용해도 부자는 여전히 부자이므로 그들의 툴툴거림은 단지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x의 조절에 따라 지금보다 더 가혹한 빈부격차가 생길 수도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x를 어떻게 조절하더라도 툴툴거리는 계층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툴툴거림이 엄동설한에 먹을거리 고민해야 할 계층의 툴툴거림보다 훨씬 덜 절실할 것임은 자명한 이치 아닌가?

총수입 대비 세금을 제한 후의 순수입을 보면, 총수입이 커질수록 순수입 비율이 작아진다. 그만큼 세금이 커지는 것이다.
수학적으로만 봤을 때, 총수입이 무한대로 커지면 세율은 100%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바로 이 결과만을 이야기하면서 입을 쑥 내밀만하다. 그러나 총수입이 무한대로 커질 때 사실 순수입도 무한대로 커진다. 단지 세율이 증가할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세율이 높더라도 총수입 증가에 따른 순수입 증가는 반드시 따라 붙는 것이다. 결코 세율이라는 비율값만을 가지고 부자의 세금이 높네, 무겁네 말해서는 안 된다.

한편, 무한대라는 것은 실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를 잘못 이해한 욕심장이들은 무한대를 꿈꿀지 모르지만 결코 무한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총수입은 결코 무한해질 수 없고, 따라서 유한한 값의 범위 내에서, 수입이 많을수록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좋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세율이 높다손 치더라도 더 번 사람의 순수입이 덜 번 사람의 순수입보다 적을 수는 없다. 어떤 욕심장이들은 가끔 이와 같은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간교한 논리를 쓸 뿐이다. 비율과 절대값을 교묘히 섞어 말하는 것이다.
 
순수입과 총수입을 로그값으로 그려보면 정확하게 선형을 이룬다. 이럼으로써 저소득층도 고소득층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다. 고소득층의 세금에 대한 불만은 입막음할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능력이 좋아서 더 벌었고, 그 능력에 걸맞게 세금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총수입이 아닌 순수입만 따져도 부자는 덜 부자에 비해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소득을 구현할 수 있다.

세금과 총수입을 로그값으로 그려보면 세부담 비율이 저소득층 최하위 그룹에서 아주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파른 상승을 보이다가 결국 선형적인 변화로 바뀌는데 비선형이 선형으로 바뀌는 이 지점을 중산층 세부담율로 정하면 합리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흑묘백묘라는 말이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뜻으로, 잘 먹고 잘 살자는 욕구가 이념에 앞선다는 정도의 생각이 담긴 비유다.

아무리 흑묘백묘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 개나 소가 쥐를 잡아도 좋은 것인가?

일만 잘하면 도둑놈을 리더 자리에 앉혀도 되는 것인가?

쥐를 잡으라는 자리에 쥐를 앉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만 잘한다면 발가벗고 회사에 다녀도 좋다는 그런 식의 목표 지상주의는 곤란하다.
일만 잘한다면 도둑놈이 내 지갑을 관리해도 좋다는 식의 생각은 정말 곤란하다.

진짜 문제는 일도 못하는 도둑놈을 일 하나는 잘 할 것이라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며,
이 착각은 스스로가 멍청해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정보의 주입에 의해 생긴다.
잘못된 정보,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대표 사기꾼들도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화폐 전쟁"을 보다가, 이 세상에는 무언가 대단히 불합리한 권력이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관련 주제를 더 보기 위해 검색하다가 "탐욕의 시대"를 알게 되었다. "탐욕의 시대" 앞 부분에 미국 독립 선언서 일부 발췌가 나온다.
현대의 탐욕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2백년도 더 오래된 미국 독립 선언서 얘기인가 했더니 그 내용이 참으로 깊은 맛을 전해준다.
그리고, 2008년의 대한민국이 눈 앞에 떠오른다.



아래 인용한 미국 독립 선언문 번역의 출처는,
http://cafe.daum.net/joucheol/587L/1067?docid=veRc|587L|1067|20060115221205&q=%B9%CC%B1%B9%20%B5%B6%B8%B3%20%BC%B1%BE%F0%BC%AD%20%C0%FC%B9%AE&srchid=CCBveRc|587L|1067|20060115221205
단, 원문의 people이 '인민'으로 번역된 단어는 내가 더 좋아하는 표현인 '민중'으로 바꾸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민중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민중의 권리인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이 경험해 온 바에 의하면 오랜 역사를 가진 정부를 천박하고도 일시적인 원인으로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것, 인간에게는 이미 관습화된 형식을 폐지하면서 악폐를 시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악폐를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그러나 오랜 동안에 걸친 학대와 착취가 변함 없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인민을 절대 전제 정치 밑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분명히 했을 때에는, 이와 같은 정부를 타도하고,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새로운 보호자를 마련하는 것은 민중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인 것이다.


참고로, 아래에는 미국 독립선언문 원문을 인용하였다. 출처는,
http://en.wikipedia.org/wiki/United_States_Declaration_of_Independence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That to secure these rights,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That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 laying its foundation on such principles and organizing its powers in such form, as to them shall seem most likely to effect their Safety and Happiness. Prudence, indeed, will dictate that Governments long established should not be changed for light and transient causes; and accordingly all experience hath shewn, that mankind are more disposed to suffer, while evils are sufferable, than to right themselves by abolishing the forms to which they are accustomed. But when a long train of abuses and usurpations, pursuing invariably the same Object evinces a design to reduce them under absolute Despotism, it is their right, it is their duty, to throw off such Government, and to provide new Guards for their future security.

...

민중의 눈과 귀와 입이 열리기를 바란다.

어떤 인간들은 원칙과 상식과 정의를 말하면 곧바로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정신착란적 논리비약을 배설한다.
어떤 인간들은 원칙과 상식과 정의와 정반대로 살면서 정작 그 더러운 입으로 자신들이 그 중심에 있노라 배설한다.

원칙이 우선인지 상식이 우선인지 정의가 우선인지, 그러한 순위는 없다.
정의가 있다면 원칙과 상식은 당연히 따라온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라면 정의와 상식이 따라오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원칙과 정의는 처음부터 살아 있다.

고시에 붙고 연수원에 다니던 한 어린 친구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봉투는 받을 겁니다. 왜냐고요? 그게 바로 소득 재분배이기도 하고, 나는 봉투는 받되 절대로 그들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정의를 지키는 겁니다."
그 녀석이 친구의 매제될 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술을 끼어 얹었을 것이다.

사회의 정의를 얘기하던 한 녀석이 자기는 정작 다운 계약서를 작성했단다. 나는 다운이니 업이니 하는 용어도 잘 몰랐었다. 집을 살 때 취득세(?)를 낮추기 위해 이중으로 만든다는 다운 계약서.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정의를 말하던 놈이 갑자기 웬 탈세 얘기냐?"
친구는 항변했다. "그게 왜 탈세냐? 남들 다 하는 거 나도 할 뿐인데."

남들 다 하니까 그건 상식이고, 나도 그걸 따라할 뿐이라 나는 거리낄 것이 없다...
참으로 답이 안 나오는 얘기다.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렸던 친구가 말한다.
"나쁜 놈들이 말이지, 왜 나만 잡냐고. 치사하게 길목에 숨어서 말이야."
나는 물었다. "그게 왜 나쁜 짓이냐? 속도 위반한 운전자를 단속한게 왜 그렇게 욕을 먹을 짓이냐고."
친구는 흥분한다. "왜 숨어서 그러느냐 이거야. 돈 달라는 거 아냐? 그래서 만원으로 해결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나쁜 짓이, 원칙을 위반한 나쁜 짓이 시작된다.
돈을 준 친구나, 그거 받고 친구를 봐준 경찰이나 둘 다 나쁜 놈이다.
그럼에도 친구는 떳떳하다. 돈 받은 경찰은 나쁜 놈이고, 딱지 안 떼려 돈을 건네는 것은 누구나 다 하니까 돈 준 자기는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란다.

나는 법을 잘 모르지만, 만원으로 위반을 면제받았다면 일종의 뇌물 공여와 뇌물 수수가 성립하는 것 아닌가?

나의 쉽지만은 않았던 서류 처리를 너무나 친절하게, 그리고 자기 일처럼 잘 도와준, 그러나 말투는 좀 무뚝뚝했던 어느 공무원에게 고마운 마음에 점심 같이 하자고 했다. 그는 단호히 그리고 정중히 거절했다. 민원인으로부터는 점심 한 끼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글쎄... 일이 다 끝나고 난 후 평범한 점심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내 제의가 뇌물 죄목에 성립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공무원은 거절했다.

정의와 상식과 원칙. 이것은 마치 제갈량의 솥발 또는 요즘말로 삼각대와도 같은 것이다.
정의와 상식과 원칙.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서지 못하면 셋 다 서지 못하는 것이다.

내 기억이 닿는 오래 전부터 시작해서 200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신문과 권력기관들이 하는 꼴을 보자면 이들이 하는 짓은 마치 솥발 세 개 중 하나가 불균형할 거면 차라리 솥발 세 개 다 무너뜨려서 또다른 균형(?)을 맞추자는 심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솥 위에는 그들과 그들의 밥줄인 상류층이 있을지 모르지만 솥발이 없어짐으로 해서 그 솥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의와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으니 결국 이런 일들이 생긴다.
정말 거악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지나간 메아리의 잔영을 털어 먼지를 일으키려 한다.
먼지가 일어날 낌새라도 보이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으로.. 아니 더 정확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죽어가는 시체를 발견하고 그에 달려드는 스캐빈저들 마냥 달려들어 턴다.

먼지? 안 나기는 어렵지.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털어서 황사가 일어날 수준의 거악은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더러운 입으로는 정의와 상식과 원칙이라는 말을 함부로 배설한다.

이미 죽어 이제는 부패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정의, 상식의 자리를 어느새 꿰찬 몰상식, 무너져버린 원칙이 또다른 원칙이 되어가는 이 슬픈 자화상.

정말이지, 어린애들 키우기에 힘들고, 슬픈 나라다.

데시벨 단위라고 들어 보셨나요? 소리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deci Bell)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고안한 단위입니다. 약자로는 dB라고 쓰며, 소리지르기 게임이나 소음 측정을 할 때 쓰이는 마이크처럼 생긴 장비에 표시되는 단위죠.

데시벨은 로그로 표현됩니다. 소리는 공기 압력의 파동인데요, 이걸 줄여서 음압이라 합니다.

실제 음압을 기준 음압으로 나누고 이를 로그로 만들어 10을 곱한 것이 데시벨입니다.
(기준음압은 정상적인 귀가 들을 수 있는 제일 작은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0dB가 됩니다.)
(접두어 데시가 10을 곱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왜 로그냐. (log)

고등학교 때 로그 함수가 처음 나오지요. 로그는 크게 어렵게 볼 것 없이 그냥 배수입니다.

1, 10, 100, 1000, 10000, ...

십진수의 자릿수 증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저렇게 됩니다. 한 단계마다 10배로 증가합니다. 이건 공비 10을 가지는 등비수열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 수열을 밑수 10을 가지는 로그로 표현하면..

0, 1, 2, 3, 4...

이렇게 바뀝니다. 다루기가 쉬워지지요. 쓰이는 숫자 개수가 줄어들기도 하고, 그래프로 표현할 경우 기하급수적 곡선이 아닌 단순한 직선으로 표현되기도 하니 다루기 쉽습니다. 그만큼 이해도 쉬워집니다.

아직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공부해보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아직 학자들이 연구 중인 주제인지도..)

" 인간은 소리를 로그적으로 듣습니다. "

50데시벨의 소리보다 100데시벨의 소리는 우리 귀에는 두 배 더 크게 들립니다. 그런데 실제 음의 압력차이는 두 배가 아니라 십만배 차이가 납니다. 로그 덧셈/뺄셈 방정식을 쓰면 금방 이해가 가죠.

사람은 소리만 로그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빛도 로그적으로 감지한다고 합니다.

인간 5감 중 정보를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시각, 그리고 그 다음 순서인 청각.. 이게 전부 로그적 감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감각들인 촉각, 후각, 미각 등도 로그적인지는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욕심도 분명히 로그적입니다. 돈의 예를 들지요. 

100만원 소득이던 사람이 200만원 소득을 올리게 되면 그는 두 배의 만족을 일단 느낍니다. 실제 금액 증가는 100만원이죠.

그런데 1000만원 소득이던 사람이 2000만원 소득을 올리게 되어도 그는 '단지(?)' 두 배의 만족을 느낄 뿐입니다. 실제 금액 증가는 1000만원 즉, 앞서 100만원 소득자의 증가치보다 10배나 더 되는데 말입니다.

100만원이 아닌 1000만원의 소득을 더 벌게 되는데도, 고소득자 역시 자신의 소득 증가를 절대금액이 아니라 비율 즉, 로그적으로 느낍니다.

사회적 빈부격차의 불행은 이런 로그적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인간의 본능에 따른 '인지'는 똑같이 두 배더라도 실제 중요한 절대적 증가액은 기존 소득격차에 따라 몇 배 이상이 난다는 것을 더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인지'를 해주어야 합니다.

경제학도가 아니라 더 상세하게는 분석 못하겠습니다만..

물론 더 버는 사람의 씀씀이 폭은 덜 버는 사람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란 쓰는 즐거움을 위해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물물교환 수단이니까요. (돈을 증가시키는 자체에 인생의 재미를 느끼는 독특한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나쁜 뜻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류라는 점은 확실.)

아무리 그래도 더 버는 사람은 덜 버는 사람의 소득증가 비율을 탐하고 따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장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기업가나 정치가들은 인간의 로그적 감각 내지 욕심 자체를 지극히 부풀리고 부추깁니다. 요즘의 종부세 논란을 보더라도, 이게 과연 인간의 머리 그것도 리더들의 머리라는 데서 나올만한 얘기인지, 아니면 예전에 내가 키우던 비글 대가리 수준에서 나오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비글.. 그 녀석이 식탐 하나는 끝내 줬거든요. 먹을 것이라면 쓰레기고 날오징어고 구분을 안 하는 그 식탐.

사람이 사람이라 불림은 본능을 통제할 줄 알고, 적어도 그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로그는 비율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게 비록 우리 감각에 선형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 세계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는 성향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그적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면 개인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어야할지는 제 몫이 아니라 사회학자들이나 정치인들 몫이므로 일단 숙제를 넘깁니다.

언제쯤이면 인간의 탈을 쓴 돼지를 안 보게 될까요?

올림픽이 한창이다.
한국 선수들이 열심히 땀 흘린 결실을 보고 있다.
금메달. 그래 기분 좋고 중요하다.
하지만 올림픽이란 참가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보면서 즐기면 된다.
다만, 그런 세계 무대에 나갔다는 사실 하나라도 대표 선수들은 이미 보통 사람의 인내력은 훨씬 뛰어넘는 경지에서 훈련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새겨야 한다.
나보다 훨씬 젊은이들이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나는 그런 대표 선수들의 인내력 수준을 넘을 자신이 없다. 엄살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런데 내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쥐새끼가 있다.
더운데 땀도 나고, 혈압도 오른다. 쥐새끼 때문에 더 그렇다.

독새 낀 쥐새끼 눈깔.
더운데 땀도 나고, 혈압도 오른다. 쥐새끼 눈깔 돌리는 소리 때문에 더 그렇다.

진작에 잡았어야 했는데.
더운데 땀도 나고, 혈압도 오른다. 놓친 쥐새끼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옛말인지, 아니면 현대사에서 등장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털면 먼지가 얼마나 날까? 나 자신이 궁금하다. 나 역시 털어서 먼지 안 날 리는 없다고 본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어떤 꼴통들은 지들이 불리할 경우 전가의 보도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말을 써먹는다.
즉, 여기서 어떤 꼴통들이라 함은 똥 묻은 개들을 말함이다.

똥 묻은 개들의 똥가루를 받아 먹으려 열심히 애쓰는 매우 많이 배워 먹었다는 부류가 있다.
똥 묻은 개들의 개 노릇을 하는 그들은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알까?

털어서 먼지 안 날 놈은 정말 드물다.
예수를 털어도, 석가모니를 털어도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당시 실정법으로 털자면 뭔가 털려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똥 묻은 개들의 개 노릇을 하는 자들은 털어도 털어도 먼지가 나올 것이 뻔한 놈들은 놔두고,
털어서 나올 먼지의 양이 뻔한 약한 자들을 먼저 턴다는데 있다.

털어서 먼지 많이 나올 놈들은 먼지가 너무 많이 나올까 걱정되어서인지,
그 먼지 털다 보면 지 먼지도 나올까 걱정되어서인지,
먼지 많이 나올 놈들의 먼지는 결국 털 놈들의 떡값이어서인지,
도대체 뭔 생각으로 먼지 많은 놈들의 먼지 털기를 안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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