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르는 물고기 구피. 정확히 말해 주종목이 구피고 딸린 식구들로 생이새우, 체리새우, 네온테트라, 그리고 코리도라스가 있다.

아내가 미장원에서 종이컵에 얻어온 구피 네마리가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종이컵에 들어 있던 작은 멸치만한 이름 모를 물고기 구피 네 마리. 아내는 녀석들의 이름이 구피라 했다. 구피? 웬 개 이름? 그랬다. 나는 이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초등학생 실과 시간이었던가? 금붕어 기르는 방법 중에 물 갈아 주는 이야기만 기억이 났다. 수돗물을 받아서 며칠 묵힌 후 갈 것. 그렇지 않으면 수돗물이 가진 독성으로 물고기가 죽는다. (물고기를 죽이는 수돗물을 사람은 마시는 거다. 물론 끓여 마시는 것이 대세지만.)

나는 구두쇠다. 그래서, 물론 신기하고 이쁘기는 하지만, 이런 물고기들에게 돈을 들이기는 싫었다. 부엌에서 쓸만한 그릇이 없나 뒤적거렸다. 고추장 유리병이 눈에 들어 왔다. 깨끗이 씻었다. 하루 묵힌 수돗물을 붓고 종이컵보다는 많이 더 넓은 유리병으로 옮겼다.

어린 구피 녀석들은 그 유리병에서 석 달을 살았다. 애견가에 해당하는 애어가들이 보면 나를 아주 무식한 놈이라 부를 방법으로 물갈이를 했다. 작은 유리병 속에서 자라는 네 마리의 물고기. 이틀이면 물이 뿌옇게 되고 시큼한 비린내가 났다. 그때마다 나는 물을 싹 갈아 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런 완전 물갈이는 물고기들에게 대단한 스트레스라고 한다. 나는 그걸 몰랐다. 다만 맑은 물을 주고픈 욕심이었을 뿐.

그러던 어느날. 약 석 달쯤 지난 날이었을 것이다. 유리병 속에 뭔가 작고 까만 것이 휙 움직였다. 나는 순간 똥덩어리인줄 알았다. 물도 이미 많이 뿌옇게 되어 있었다. 물 갈아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리병을 한번 확인하는데 길이는 쌀알만하고 굵기는 성냥개비 불탄 이후 재만한 것들이 물 속에 있었다. 새끼였다.

아니 언제 알을 낳았지? 궁금했다. 물 갈아준지 채 이틀. 그 사이에 알 낳고 부화되고 했나? 시간의 역추적이 급한 때가 아니었다. 일단 물이 너무 더러웠다. 새끼 여섯 마리는 숟가락으로 떠서 자그마한 컵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럴 때는 인터넷의 순기능이 참 마음에 든다. 검색어 구피. 많은 정보들. 이 녀석들이 새끼 낳는 물고기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난태생. 뱃속에서 알이 부화되어 새끼 형태로 세상에 나오는 물고기. 살모사만 그런 줄 알았는데 물고기도 이런 종류가 있구나.

아이들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 열악한 환경에서 새끼를 낳은 어미들-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도 장하지만 새끼들의 존재 자체가 너무 감동스러웠다. 비록 미물이지만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새 생명.
그래서 어항을 샀다. 나는 그전까지는 남의 집이나 건물에서 어항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뽀글거리는 기포가 단지 공기를 공급하는 목적 하나만을 가진 것인줄 알았다. 공부를 하고 보니 아니었다. 공기 공급도 되지만 동시에 다른 여과기를 가동하는 역할도 한단다. 여과기 가동 원리도 공부했다. 공기가 아닌 전기의 힘으로 가동되는 여과기도 많았다.

어항은 금방 두 개가 되었다.

그리고 바닥의 사료 찌꺼기를 먹는다는 코리도라스도 사고, 충동구매로 네온테트라도 사고, 체리새우나 생이새우는 나름 그 역할에 대해 공부를 한 다음에 샀다.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어항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이 때문에 운동 시간이 줄어든 단점은 있지만 그냥 바라보는 자체가 즐겁다. 아내나 아이들 눈치가 보여 오히려 자제를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왜 그럴까?

나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기르는 것을 많이 바랬다. 어려서 살던 집 뒷마당에 돌고래가 사는 수족관을 꿈꾸기도 하고 사자도 꿈꾸었다. 동물의 왕국을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 아니면 내 본성 어디에 그런 동경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와중에 가정을 꾸민 이후 개도 길러 봤지만 개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두 번을 실패했다.

그러다가 이 물고기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어항을 들여다 본다. 물이 아주 맑다. 나름 나의 상식과 인터넷 정보를 결합해서 여과력도 높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맑은 물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물고기들이 건강하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새우들은 걸핏하면 죽어 나가는 것이 속상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새끼새우들도 눈에 간혹 띈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

내 통제 하에서 어떤 생태계가 돌아간다는데 대한 만족감일까? 아니면 그냥 사랑일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하곤 하던데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랑이라기 보다는 통제 또는 지배에 대한 포만감 쪽이 더 큰 것 같다.

물론 개와 물고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개의 감정 표현이 훨씬 더 풍부할테니 말이다.
물론 물고기를 통제 대상 하나로만 보지는 않는다. 물고기가 새끼 낳으면 엄청 기쁘고 죽을 때면 속이 상하다.

물고기 기르기. 소위 물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물생활이 언제까지 갈런지는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몇 미터 길이의 어항을 집에다 설치하고 싶지만 공간도 여력도 자금도 없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두 개의 어항으로 계속 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겨워지는 순간이 올까? 나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좋다. 아침에 일어나 밥주고, 출근 전에 잠시 또 멍하니 들여다보고 이런 일상의 반복이 재미있고 행복하다.

물고기에게 감사 표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지금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더듬어 본다. 

나는 엄마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조상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더 많이 되감아지면 쥐를 거쳐물고기가 되고 나는 다시 작고 미약한 단세포 동물이 될 것이다.

단세포 동물은 걸쭉한 분자의 죽이 된다. 

지구는 물이 그득한 바위 덩어리다.

지구는 먼지가 뭉쳐서 만들어진다.

지구를 만든 먼지는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뿜어져 나온다.

별은 그 중심부의 힘으로 점점 더 무거운 원자를 만들어낸다.

별이 만들어지기 전에 빛이 있었다.

별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공간에 퍼져 나간 먼지 구름은 수백 광년에 걸쳐 흘러다니다 또다른 살아 있는 별들의 중력과 먼지 구름 자체의 전자기적 상호작용을 통해 어느 장소에서 다시 뭉친다.

다시 뭉친 별의 잔해는 또다른 별이 되고, 별이 되지 않은 다른 잔해는 행성이 된다.

그 행성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금 내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모여 나라는 영혼을 담고 다니는 그릇 노릇을 한다.

내 육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이렇게 상상이라도 되지만, 내 영혼이 어디서 왔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내 영혼이나 자아는 컴퓨터 운영 시스템이나 그 위에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자아는 DNA가 가진 강한 생존 본능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 강하게 믿고자 한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에는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미없는 우주는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는 우주가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누군가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내 주위에는 아직 없다.

누군가 알았을지 모르는 사람이 남긴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름과 더불어 공허해져가고 있다. 

바다를 본 사람이 아무리 바다 이야기를 해줘도 산의 사람들은 그나마 호수라도 이해하면 다행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고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물고기 이야기에서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저는 개를 두 번 길렀었고 두 번 다 실패했습니다. 개와 저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애완용으로서도, 식품으로서도..

 

저는 복날이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릅니다. 초복, 중복, 말복 세 개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양력인지 음력인지조차 모릅니다.

복날이 다가오니 어느 국제 동물애호가 단체에서 한국 보신탕 문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고 기사가 나오네요.

 

식품으로서의 개.

저는 보신탕을 두 번인가 세 번 정도 시도해봤습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부서 사람들이 죄다 보신탕을 좋아하더군요.

당시 저는 신입사원이었던지라 대놓고 개 못 먹는다고 하기는 싫고, 의욕에 넘쳐서 같이 먹었더랬습니다. 생전 처음 먹은 개고기 요리는 육개장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집에서 한번 정도 더 먹었던 것 같고,

나중에 사천 살 때 굉장히 큰 보신탕 집에서 수육처럼 된 것을 한 입 먹어본게 마지막이군요.

 

제가 개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도, 그렇다고 개를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개고기 자체가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뭐랄까.. 개고기라는 말만 들으면 개가 풍기는 개비린내가 먼저 생각나서일 겁니다.

사실, 요리로서의 개를 먹어본 기억에 그런 개비린내는 없었습니다만, 사람의 선입견이라는게 무섭잖아요.

 

제가 그냥 개고기를 싫어할 뿐이지, 개고기 드시는 분들께는 아무런 호불호 감정이 없습니다.

 

아주 어릴 때, 시골에 살면서 개 잡는 광경도 봤고, 돼지 잡는 모습도 봤습니다.

개를 나무인가 전봇대에 매달아놓고 줘패고 불에 그슬리는 장면은 어린 마음에.. 끔찍하다기보다 그냥 아주 시끄러운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돼지 네 다리를 꽁꽁 묶어 자빠뜨린 뒤 목에 칼로 구멍 내서 잡는 모습에서도 불쌍하다거나 잔인하다는 기억보다는 돼지가 굉장히 시끄럽게 죽는다는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측은지심에 앞서 시끄럽다는 기억이 남아있을 테고요..

지금은 아마 개나 돼지를 잡는 광경을.. 아무리 신사적(?)으로 잡는다 한들.. 직접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어릴 때의 나보다 더 순수해졌다는 것은 아닐텐데..

측은지심을 가진다는 것도 결국은 세상으로부터의 때가 묻는다는 한 현상인지.. 헷갈리네요.. ^^

 

이 세상의 동물 새끼 중에 사람 다음으로 이쁜 것이 개일 것입니다. 대체로요..

(물고기 새끼도 무지 이쁩니다.. 직접 키우는 입장에서는요..^^)

 

저희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옆집에 개 키우는데 그 집에 놀러가마 강아지가 내한테 자꾸 안긴다."

"강아지 눈을 들여다보마 이런 이쁜 눈을 한 거를 우째 사람들이 잡아먹노 그런 생각이 든다카이."

 

아버지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새 개 먹는 거 그거 다 모르고 하는 짓이다."

"내 어릴 때 (아버지는 해방 때 이미 고교 졸업생이셨으니 연세 많으십니다.) 기억해보마,

 키울 개하고 먹는 개는 종류가 달랐다. 먹는 거로 키우던 개는 지금 안 보인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지금 삽사리라고 주장되는 그 털 긴 개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지금 길러지는, 특히 시골 지역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사견처럼 생긴 개는, 일제 당시 우리네가 그렇게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도 길에 그 개가 버려져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통용되는 보신탕은 당연히 보신탕으로서의 효과가 전혀 없을 거라 보시는 겁니다.

 

참고로, 저희 아버지 현역 한의사이십니다. 참고들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사천살 때 뒷산 너머 보신탕용 개사육장에서 본 개들은 죄다 도사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긴 자체가 아주 불쌍한 개들이었어요. 아니면 보신탕용으로서의 생을 아는 것인지.. 여하튼 표정들이 불쌍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보양 효과 없는 개들이 분명하지요.

 

도시 지역의 경우, TV로만 본 것입니다만 각종 개들이 다 있더군요.

심지어.. 애완용 강아지들까지..

여기도 분명히 그 옛날 식용으로 길러지던 개는 없는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의 보신탕은 단지 심리적 만족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야 뭐.. 식품학자도 의사도 아닙니다만.. 아버지 기억에 따르자면 지금 시대는 젖소를 한우로 알고 먹는 정도랄까요.

 

젓소를 먹든, 한우를 먹든, 돼지를 먹든.. 이런 연장 선상에서 보신탕 문화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애완용 돼지도 있지만, 상당수 돼지는 식용이듯이,

애완용 개가 다음날 보신탕 상가에 등장한다해서.. 그것이 그렇게나 기를 쓰고 반대하고 데모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도둑 맞은 주인이 펄펄 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물고기 기르지만 동시에 그 살아있는 물고기 옆에서 고등어나 심치 잘 먹습니다.

 

동물은 그냥 동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육식을 장려하거나, 개고기만 특별히 많이 먹자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고기 먹는 사람을 무슨 야만인 보듯 하지는 말자는 거지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걸음걸음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곤충들이 죽어가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거기에 별로 거리낌이 없다면 개고기 문화도 그냥 하나의 문화로 보면 됩니다.

 

개고기를 반대하시는 분들이 순수 채식주의자고 육식문화 자체를 반대하는 거라면 저는 일단 고개는 끄덕거릴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있는 행동방식이고 주장이니까요.

 

그래도 한번 더 토를 달자면, 최소한 식물은 먹어야 인간이 사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고,

식물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순환합니다. 먹이 사슬이라는 다소 냉랭한 말로 이 세상은 하나의 고리를 이룹니다.

 

사람의 식습관은 그냥 지역별 문화로 보면 좋겠습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유명한 배우가 한 말이 기억난다. 출연료와 관련한 인터뷰였는데 거기서 그가 말하길, ‘그 정도 출연료로는 기본 품위유지가 안 된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품위 유지비.

 

광고에도 품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당신의 품위를 위해 …’ 류의 표현. 어느 배우가 말한 품위, 그리고 광고에서 말하는 품위는 결국 돈과 직결된다.

 

품위는 돈의 많고 적음과 상관이 있는 것일까?

 

국어 사전에서 살펴본 품위에는 대략 다음의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직품과 직위를 같이 부르는 말. 요즘 쓰이는 뜻은 아니다.

둘째, 사람이 가져야 할 위엄이나 기품.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이다.

셋째, 사물이 가지는 고상한 인상. 이것도 이 글의 주제와 비슷하다.

넷째, 귀금속이 함유하는 가치. 이것은 이 글에서 잘못된 품위의 예로 거론될 것이다.

 

우리말 품위에 해당하는 영어는 elegance grace를 들 수 있다. 무릇, 추상적 표현을 나타내는 단어는 여러 함의를 포함한다. 방금 봤듯이 품위라는 한 단어에도 여러 뜻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어 단어도 추상적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여러 함의를 포함하며 그로 인해 품위 = grace’라는 단순한 등식에서 벗어나는 뜻으로 번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grace는 신의 은총을 뜻할 때도 사용된다. 우리말에서 신의 품위라는 표현은 없다.

어쨌든, 품위와 비슷한 뜻을 골라내서 정리하자면 elegance grace의 품위에 해당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존중을 자아낼 수 있는 행동이나 성품의 절제된 매력 또는 정중함

둘째, 매력적으로 잘 고안된 사물

셋째, 절제된 현명함. 이거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결국 우리말이나 영어나 품위에 해당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정신적 품위와 물질적 품위. 따라서 어느 배우의 품위 유지비는 비록 내 귀에는 거슬리지만 말은 된다. 광고에서 그렇게나 소비자 지갑 털려고 애쓰며 남발하는 품위라는 단어도 내 귀에는 거슬리지만 언어를 더럽힌다고 매도할 수는 없는 정확한 용법의 결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도 영어도 이 품위라는 단어가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은 이 인간 세상이 아직도 불완전하고 덜 떨어진 것임을 반증한다. 외형의 화려함과 내면의 깊이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의 행적을 빼놓고 외모만을 보면 그녀는 결코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다.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그 쪼글쪼글한 외모 어찌 보면 초라할 수도 있는 물리적 외모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품위가 높다는 말은 이럴 때만 써야 한다.

 

성철 스님의 일생을 빼놓고 외모만을 보면 스님답지 않게 살이 많이 오른 괴팍한 중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이 결코 그의 외모와 분리될 수 없고 그 모든 것을 놓고 보면 그는 참으로 거대한 장부요 스승이다. 품위가 높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외모 하나만 보자면 결코 미남의 범주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그의 일생을 같이 보면 그는 정말이지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미남이요 품격 높은 사람이다.

 

외모가 화려한 것. 물론 좋다. 못 생긴 것 보다야 기왕이면 잘 생긴 것이 좋다. 하지만 내면의 품위가 외모를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굉장한 불균형과 반전을 보게 된다. 외모와 내면의 조합을 선호도 순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선호도는 내 주관에 따른 것이다.

첫째, 내면도 아름답고 외모도 아름다운 사람. 오드리 햅번을 떠올리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둘째, 내면은 아름답고 외모는 약간 부족한 사람. 앞서 이미 예를 든 바 있다.

셋째, 내면은 별로지만 외모는 아름다운 사람. 유명 인사들 중에 이런 예가 흔히 있다.

넷째, 내면도 별로면서 외모도 별로인 사람. 얘 이름 말하면 요새는 잡아 간다. 독재이므로 함구.

 

가끔 보면 셋째 부류를 보면서 품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 경우는 그런 말하는 사람들까지 덤터기로 저렴하게 분류할 수밖에 없다. 비싼 치장과 그럴싸한 외모가 사전적 정의로는 품위에 해당할지 몰라도, 동물과는 달리 우리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정의에서는 당연히 품위의 범주에 들 수 없다. 그럴싸한 외모는 가지면 좋은 것정도이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이라 자칭하는, 실제로는 쓰레기만도 못한 수구 언론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주 구사했던 비난은 대통령으로서의 품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걔들이 아닌 개들이란 표현을 쓰겠다. 개들이 바라는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는 한 손에는 떡, 다른 손에는 칼을 든 모습이다. 개들은 그게 바로 대통령 내지 권력자의 품위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 품위를 갖추었고 진짜 품위 있는 권력 아니 권리를 구사한 분이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권력과 권리의 차이도 한번 논해보고 싶다.

수구언론 개들은 나 같은 사람 안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일 내가 노무현 대통령 정도 되는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결코 한 손에는 사람, 다른 손에는 민주를 들고 내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 나는 수구 개들이 바라는 식의 품위를 넘어,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채찍을 들고 개들을 다루었을 것이다.

개들은 아직 모른다. 개들이 만났던 사람이 진짜 품위 있는 사람이었음을. 그러니까 걔들이 아니라 개들이라 부르는 거다.

 

테레사 수녀는 희생과 봉사를 통해 품위를 갖추었다.

성철 스님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도 과정을 통해 품위를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존 대통령들이 구사했던 권력을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의 권리 범위로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품위를 이루었다. , 그에 앞서 적어도 내게 있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 보다는 마누라가 더 소중하다는 그 호랑이 같은 목소리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품위 있고 용기 있는 분이 되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할 수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성철 스님이나 테레사 수녀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관 측면에서 다른 것이 있다 하여, 이런 분들의 품위를 못 알아 본다면 그 때는 그 못 알아 보는 지적 수준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공부 더 해야 한다.

 

품위가 높은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확고한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의 수준에 이를 정도의 확고한 가치관이 있으면서 마찬가지로 그 가치관을 끊임없이 다듬는다는 것이다. 확고함과 다듬음이 모순된다고? 다이아몬드 원석은 아주 단단하다. 하지만 다듬음으로써 화려한 보석이 되는 것 아닌가?

 

석달쯤 전일까? 아내가 미장원에 갔다가 작은 멸치만한 물고기 네 마리를 종이컵에 얻어 왔다. 물고기 종류 이름이 구피라고 한다.

개도 키워봤고, 거북이도 키워봤고, 병아리도 키워봤는데, 우리 집에서 물고기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다. 아이들도 좋아한다.

 

어느 날, 구피 한 마리가 매우 비실거렸다. 그때까지 물고기를 기르는 것은 내 몫이었다. 밥도 주고 2~3일에 한번씩 물도 갈아주고. 게으른 내가 물고기 당번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물 갈아줄 때 물고기 꼬물거리는 것을 아내도 아이들도 징그러워하기 때문이다.

개가 귀엽지만 개똥은 더럽듯이, 물고기 보는 재미와 물고기 만지는 느낌은 다른 것이니까.

 

아픈 물고기 한 마리를 두고 다른 세 마리가 마치 뜯어 먹듯이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놀랬다. 아무리 미물이라 하나, 동료 의식에 대한 기대에 앞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생물이 단지 아프단 이류로 저렇게 뜯어 먹다니! 내가 밥도 충분히 줌에도 불구하고.

아픈 녀석의 너덜너덜해진 지느러미를 봤을 때 다른 놈들이 뜯어먹는 수준의 공격을 한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격리 조치.

하지만 격리된 아픈 녀석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난 그 때 다른 녀석들을 변기에 쏟아 버리고픈 충동을 느꼈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남은 세 마리는 아주 생생하게 지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경복궁 나들이를 다녀 왔다. 일요일 저녁의 나른하고 안락한 시간.

지난 금요일에 물을 갈아 주었는데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물이 또 뿌옇다. 물을 갈아줄까 싶어 작은 어항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랬다.

새끼다! 여보, 얘들아~”

 

난 첨에 물 속에 물고기 똥이 떠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좁쌀보다 더 작아 보이지만 물고기 새끼 몇 마리가 분명히 헤엄치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물을 갈아 주었는데, 그 직후 알을 낳았다 쳐도 세상에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새끼가 나오나? 구피는 새끼를 바로 낳는 종인가? 궁금함이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구피는 난태생 즉, 물고기지만 어미 뱃속에서 알을 깬 후에 새끼의 모습으로 나온다고 한다. 아하~.

 

똥하고 새끼가 비슷한 크기로 둥둥 떠다녀서 구분이 어려웠지만 잘 살펴보니 이미 죽은 녀석이 하나, 그리고 여섯은 잘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큰 녀석들의 모양새가 이상하다. 새끼를 쫓아다니면서 먹으려는 모습이다. 이런 미물들이라 생각하며 새끼들을 숟가락으로 떠서 격리시켰다.

 

격리한지 하루 만에 또 한 마리가 죽었고, 이틀이 지난 지금 다섯 마리의 새끼들은 안전한 종이컵 속에서 잘 헤엄치고 있다.

 

비록 미물이지만, 우리 집에서 애완 동물을 키워 새끼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쁘기도 하고 가슴이 약간 시리기도 하다.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저렇게 갇힌 생명이라는 것. 아주 안전할지는 몰라도 갇혀서 길러진다는 것. 이런 생각들이 든다.


많이들 받아 가세요.
저도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저는 참 게을러요. 당신을 좋아한다 말만 하면서,
대통령 선거 운동 당시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출장 때문에,
탄핵 사태 때는 첫날 딱 한 번만 촛불을 그것도 30분 남짓, 그리고는 또 일 핑계,
인터넷 글쓰기는 귀찮아서 그냥 흐지부지,
당신이 퇴임하신 뒤에는 봉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구름처럼 잔뜩 그리고 휴일이면 방에서 뒹굴,

그러다 .. 결국 당신은 너무 일찍 떠나 버리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살아서도 날 울리더니, 가시면서도 또 울리네요.

29일 장례식 때는 반드시 참석하리라 생각했는데, 또 출장.
그런데 마침 출장지가 창원이더군요.
이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인가요?

후배와 함께 차를 몰고,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나날을 보낸 그 마을을 해가 지기 전에 밝은 빛으로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것은 또 허락치 않으셨네요.
날이 다 지고, 어둠으로 산자락을 겨우 파악할 지경이 되어서야 당신이 사랑한 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몰지각한 사람들 말고,
우리 노빠들은 이미 머리로는 다 아는 사실을 하나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정말 깡촌 출신이더군요. 내 고향도 깡촌. 그래서 더 잘 이해합니다.
전형적인 시골.
당신께서는 그 고향을 사랑하셨죠. 그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세상이라는 것.
당신은 사람 사는 세상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지만,
세상에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당신께서 이번에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대단하더군요.
평소 그렇게 짜증 잘 내는 우리네가 말입니다.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거의 짜증내지 않더군요.
물론 애들은 짜증을 냈어요. 당연할 수밖에요.
아이들은 노무현이라는 당신을 아직 잘 모를 수밖에요.
간간이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투정은 오히려 이쁘더라고요.
물론 내 아이가 그랬다면 나는 혼냈겠습니다만.. 부끄럽네요.
(좀 더 너그러운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그 날, 두 발로 나가셨던 마을을, 작은 상자에 누운 채로 들어오시던 그 장면을 뉴스로 봤습니다.
따님이시죠. 뭐 같은 언론에 그렇게 시달리던 그 따님.
뉴스라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아버지, 아버지'를 되뇌이며 울더군요.
나도 두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슬펐습니다.

자식들이 그렇게 아파할 것을 당연히 아실 것이면서도, 그렇게 떠나야 했던 그 외로움 속의 당신이 생각나서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어렴풋이 기억할 거에요.
자기 자식들에게 말하겠죠. '나도 임마, 그 분 가시는 길에 조문을 갔었단 말이야.' 자랑할 겁니다.
사실 잘 모르면서 말이죠. 지금은 귀엽죠. 나중엔 어른이 될 테고.

난 그 아이들보다 말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걸었던 그 길, 당신이 추구했던 그 가치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만,..

솔직히 그건 좀 이른 것 같습니다. 호기심에 와본 듯한 사람들도 좀 보이더라고요.
난 속좁은 남자라 그런 모습이 좀 눈꼴 시기도 했습니다만,
노무현님, 당신께서는 그 남자다움으로 그런 호기심 어린 방문객들도 웃으며 맞으셨을 거라 확신합니다.

여러 날을 쪼개서 울어 그런지,
아니면 와본다 와본다 하면서 결국 당신이 떠난 이후에 당신의 마지막 발자욱이 머물렀던 곳을 따라 걸어 그런지,
오히려 눈물은 나지 않더군요.

그 긴 줄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을 회관 어드메일까요?
별자리를 보려 밤하늘을 쳐다봤습니다.
단풍나무던가요? 나는 나무 이름 잘 모릅니다. 대통령께서 양해해주세요.

하여튼 울창한 나뭇잎이 달린 나무 한 그루가 밤하늘을 보려 고개를 든 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핸드폰을 꺼내어 그걸 찍었습니다.
짙은 밤하늘에 조명을 받아 오히려 더 짙푸르게 보이는 그 나무를 찍었습니다.
왠지.. 당신을 보는 듯 했습니다. 참 푸르고 상쾌한 나무.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신에게 고개 숙여 인사 드렸습니다.
국화꽃 향기를 맡으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후배가 미리 고민했더랬습니다.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이 식사 대접한다고 고생한다는데 우린 그냥 먹지 말죠?"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분 가시는 길에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국 한 숟갈이라도 나는 먹을 거다."

빵과 음료수를 나눠주시더군요.
안 울려고 했는데, 빵 한 입 베어 무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지금 또 눈물이 나네요.
살아 생전 그렇게 보고 싶었었는데.. 이 놈의 게으름 때문에.. 이제서야..

몰지각한 사람들에게서 아방궁이라 불리는 당신의 마지막 집을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
여사님 생각이 먼저 나서 애처로왔습니다.

까만 밤 사이로 당신께서 운명을 달리한 바위가 보이더군요.

역시나, 그곳조차도 단지 호기심어린 눈길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발로 엉덩이를 차주고 싶었지만, 당신의 넓은 마음을 배우고 싶어 꾹 참았습니다.

난 그 바위를 보면서 당신이 마지막 겪었을 고통이 떠올라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길을 돌아서면서 계속 되뇌었습니다.
난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난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 당신께서 살아서 보여주셨던 메시지를,
이 바보.. 당신과 같은 류의 우직한 바보가 아니라 진짜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인 이 바보는,
이제서야,
당신이 가고나서야 당신께서 보여주고 싶어하셨던 메시지 하나를 가슴에 담습니다.

열정.

대통령님, 그리고 노짱..

당신의 메시지는 분명히 사람을 위한 열정입니다만,
나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일단은 열정에 불을 먼저 붙이려 합니다. 덕분에 이미 불붙었는지도 모르죠.
가슴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머리에는 사람이 시작되려 합니다만, 워낙 조변석개하는 성격이라 섣불리 약속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사람을 머리 속에 새기려 노력을 계속 하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

난 그대가 가신 그 세상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압니다.

노짱 당신은 말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다시 살아 들어온 거에요.

당신의 가족들은 한동안은 너무나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이라는 남편, 당신이라는 아버지, 당신이라는 할아버지, 당신이라는 동생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건강하게 일어들 나실 겁니다.

푹 쉬세요.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서는 다시금 열심히 앞장 서 주세요.

20058. 회사 일 때문에 프랑스 파리를 마치 이문동에서 잠실 가듯이 매달 왔다갔다 하면서 살던 때다. 고등학교 친구인 눈박사로부터 메일이 왔다.
세느 강변에 있다는 인공 해변이 얼마나 좋으냐고 묻는 편지

나는 간단히 답해줬다. 서울 사는 사람이 63빌딩 잘 가지 않고 대구 사는 사람은 팔공산에 잘 가지 않는 법이라고.
사실이 그랬다. 나는 세느 강변에 그런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전혀 관심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가본 적 없음.

답장의 말미에 썼다. 이번에 들어갈 때 포도주 한 병 사갈까?


돌아온 답이 걸작이다
.

 

포도주나 이런 건 사갈까 물어보는게 아니고 사왔다 라고 연락하는거다.

 

친구들의 재치에 가끔 감탄한다.


여느 공부가 다 그렇듯, 영어 공부에도 왕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가 절대로 표준 영어가 아닙니다. 표준 영어는 없습니다.
영국은 영국식 영어고, 미국은 미국식 영어고, 호주는 호주식 영어입니다. 더구나 각 나라에는 지역별 사투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급 연예프로들이 씨부리는 정도로 지역 사투리를 우습게 보는 것도 참 드문 짓거리입니다.

우리나라 영어 강사들 태반이 미국식 영어에만 목을 매는데 이거 정말 잘못된 행태입니다. 심지어 수강생들에게 영어 이름을 지으라고 은근 강요도 하지요?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럼 베트남 어학원에서는 베트남 이름 지어야 하고, 아랍 어학원에서는 아랍 이름 지어야 하나요?
조지 부시는 어디까지나 조지 부시지, 그 사람이 한국말 배우기 위해 조부식씨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나이 다 들어서 다른 나라말을 익히려면, 무엇보다
문법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발음이 틀려도 문법이 정확한 영어가, 발음은 캘리포니아식인데 문법은 이상한 영어보다 훨씬 더 대접 받습니다. 물론, 비즈니스 세계를 말함이지 단지 술 먹고 노는 곳에서는 과연 문법이 발음에 우선할지 아니면 반대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 비즈니스 세계의 연장 선상에서 술 먹고 노는 자리에서는 당연히/여전히 문법이 발음에 우선합니다.

인기 영어강사 중 한 명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단어가 easy 또는 busy였는데, 이 강사는 -지 발음을 우리식 'ㅈ'로 하면 외국인들이 절대로 못 알아 들으니 정확하게 영어식 'z'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허... 참...
이 강사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발음 테스트를 해봤는지 그 사람들에게 나의 한국식 'ㅈ'발음 한번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 강사가 이런 헛소리 하는 것 들은 것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 프로 자체, 심지어 가끔 채널 돌리다 이 강사 나오면 얼른 돌려 버립니다.
 

나는 당연히 영어 발음이 한국식이지만, (심지어 아내 말로는 내 고향 사투리도 영어에 섞여 있다네요.) 영어권 사람들 포함해서 죄다 제가 하는 영어소리 잘 알아 듣습니다.

우리는 영어를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고 배워야지, 결코 그 나라의 문화를 죄다 내 몸에 덮어 쓰겠다는 인식으로 하면 큰일납니다. 교육자라는 사람이 어린쥐인지, 오린쥐인지 공개 석상에서 운운한 이야기 유명하지요? 그 사람 전공이 뭔지 참 궁금합니다. 인터넷 검색하면 금방 나오겠지만서도.. 그 정도 투자할 에너지가 아깝네요.

또한, 미국식 관용어법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마십시오. 상당수 영어 강사 그것도 인기 강사나 그 교재에서 제시하는 미국식 관용어법. 이거 영국 사람들 대다수는 못 알아 듣습니다. 또한, 심지어 미국 사람들도 특정 지역, 또는 특정 세대가 아니면 못 알아 듣는 경우를 나는 직접 테스트를 통해 실감했습니다. 내가 테스트한 사람들 죄다 나름 학벌 길고 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관용어법이 못 배웠거나 못 버는 사람들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특정 지역, 특정 세대의 말을 어디서 줏어 듣고는 이것이 미국식이다라고 떠드는 장사꾼 기질을 까발리기 위해 내 테스트 상대 얘기를 한 겁니다.

비유하자면,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의 OTL을 보니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온다.' 이 표현을 못 알아듣는 한국 사람도 많겠죠?

미국식 관용어법을 남발하면 다른 영어권 사람들은 당연히 못 알아 듣습니다. 쟤가 어디서 저런 이상한 영어를 줏어들었나 생각하겠죠. 다시 한번 상기하세요.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표현은 이 표현이 통하는 계층을 만났을 때만 하면 됩니다.

특히!

미국식 관용어법 많이 알면 뭔가 지적으로 보인다는 식의 상징조작을 은연 중 하던데요.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표현이 지적으로 들리나요? 이 답의 여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 답을 미국식 관용어법에도 그대로 적용하세요. 안구에 쓰나미가 지적으로 생각된다면 미국식 관용어법 열심히 배우시고, 반대라면 그냥 재미삼아 몇 개만 익힌다는 기분을 가지세요. 

여러분은 이한우식 한국어가 좋던가요, 아니면 하일식 한국어가 좋던가요?
개인적 친소를 떠나 비즈니스에서는 이한우식 한국어가 기본 뼈대여야 합니다. 기준을 좀 더 높이자면 이한우식 한국어의 정통성에 하일식 한국어의 유머가 가미되면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죠.

이것을 영어에 그대로 대입하시면 됩니다. 

미국으로 이민갈 사람들은 소위 인구에 회자되는 인기 영어 강사들 프로그램 많이 참조 하십시오. 바나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니 적어도 미국 이민을 계획 중인 사람들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것. 그것은 바나나가 될 각오를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니까요. 이민가는 분에 대한 바나나 표현. 이건 절대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나가 될 각오를 해야 그 이국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비꼬는 것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바나나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천박한 강사들일 뿐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가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본인의 선택입니다만, 한국에서 바나나 사상을 실천하는 것은 사대주의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갈 사람들이 아니라 국제 비즈니스를 펼치거나 거기서 일할 사람들은 절대로 바나나 강사들의 영어를 듣지 마십시오. 미국식 바나나 냄새가 어설프게 풍기면 다른 영어권 나라들로부터는 경계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내가 바나나 강사들에 대한 안티처럼 보이죠? 보이는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영어 공부에 좋은 팁 하나.
 

영어 소설을 많이 보십시오. 속도 참 안 나갑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우리 소설이 그렇듯이 영어 소설도 대중 소설들은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편입니다. 톰 클랜시, 댄 브라운, 마이클 크라이튼 등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가들의 글은 읽기 쉽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단지 영어로 읽으니 속도가 좀 느릴 뿐이지만 공부와 재미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추합니다.

대중서지만 전문적 내용을 담은 앨빈 토플러나 브라이언 그린 등의 책도 강추합니다. 이건 속도가 더 안 날 것입니다만, 어차피 우리 한글로 적힌 책도 소설보다는 교양서의 독서 속도가 느린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당신이 교회에 다닌다면, 영어 성경을 읽는 것도 영어 공부에 좋습니다. (참고로 저는 교회 신자가 아닙니다만,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 성경을 뒤적거린 적도 있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팁 더.

* 외국인 특히 백인, 특히 영어권 백인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한가요? 절대로 그런 생각 가지지 마십시오.
  
당신은 적어도 그 사람 언어를 약간이라도 아는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우리말 모릅니다.
  
상대가 오히려 내게 미안함을 느껴야 할 상황입니다.

* 외국 여행 갔는데 영어를 버벅거리니까 점원 또는 서빙이 불친절하더라...
  
만일 그렇다면 절대로 그 집에 다시는 가지 마십시오. 나는 서빙을 받으러 간 것이지,
  
서빙을 해주러 간 것이 아닙니다.

* "Hello, My name is .."를 말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적어도 2개 국어를 구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다국어 구사자로서의 당당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한우씨가 우리말 참 잘 합니다만,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저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마찬가지 논리로.. 정신 멀쩡한 영어권 외국인들 역시 영어 표현이 서투르고 발음이 한국식일 수밖에 없는 저를 당연히 외국인의 영어로 이해하지 절대로 자신들의 잣대로 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우리말로 얘기할 때, 화려한 언변을 먼저 염두에 두십니까?
  
아니면, 본인의 생각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려 하십니까?
  
만약 후자 쪽이라면 더군다나 영어에 너무 주눅들지 마시고 당당히 앞으로 나가세요.

영어는 도구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전 세계 PDA 시장 규모가 점차 축소되고 있답니다. 허 참. 제가 PDA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허탈했겠지만, PDA 사용자 입장에서도 입맛 달콤한 기사는 결코 아닙니다.

 

내 돈 내고 산 물건 중에 전혀 돈 아깝지 않은 물건들이 가끔 있습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다르죠. 천 원 짜리 플라스틱 바가지가 돈 아까운 경우가 있는 반면에 백만원 짜리 고가품은 돈값 그 이상이다는 만족이 드는 경우도 있죠. 물론, 대부분은 고가로 갈수록 이거돈값 못한다는 불만이 잘 생깁니다만.

 

2004년 초에, 일정 관리를 제대로 좀 하고자 PDA를 샀습니다. (제품 이름을 광고하면 안 되겠죠?^^) 정말 대만족이었습니다. PDA가 이미 동영상도 재생하고, 음악도 재생하고 별 기능 다 있습니다만 저는 멀티미디어쪽 보다는 원래 구입 목적 그대로 일정과 연락처를 저장하는데 주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용자 입장에서는 대박을 터뜨린 활용성을 찾은 것이 전자책 보기입니다. 제가 그 전부터 텍스트로 된 책을 많이 긁어 모았더랬습니다.

 

텍스트 전용 뷰어를 깔고 나니 PDA는 훌륭한 책으로 변신했습니다. 정말 PDA 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 쓰고 얼마 후에 PDA는 차 문에 끼어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ㅠㅠ;)

 

불과 3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PDA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가끔씩,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항상 변해야 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올바름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의 이 놀랍고도 두려운 변화는 과연 발전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발악이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디지털 변화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소비자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의 증식력입니다. 소비자가 요구했기 때문에 제품이 설계되어 세상에 나오는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매한소비자를 일깨워 그 주머니를 스스로 열게끔 신제품이 소비자를 교육시키는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나쁘게 마약적인 관점으로 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디지털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그리고 가져다 줄 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감을 떨칠 수는 없으며, 변화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변화가 주는 혜택의 대부분은 자본에게 돌아가며 인간에게는 약간만 주어집니다.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본가도 크게 보면 자본의 피해자입니다.)

 

개인용 컴퓨터의 저장 용량은 이미 테라 바이트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용량이 기가 바이트이던 시절까지는 분명히 사용자(특히 회사원 입장)의 정보 저장을 선별해야 했습니다. 까딱하다가는 용량을 꽉 채우게 되니까요.

그러나 테라는 기가의 천 배입니다. 기가가 테라로 올라올 때까지는 불과 7년 정도 걸렸습니다. 10년도 되지 않습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의 정보 저장 필요량이 과연 천 배나 증가했을까요?

 

동영상을 많이 보거나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과연 그런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DVD 화질의 영화는 DVD 그대로 해도 5기가, 유사 수준 화질을 유지하면서 압축하면 2기가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테라바이트 용량이 있다면 영화 200편에서 500편이 저장될 수 있습니다.

MP3는 만족스런 음질 수준인 128kbps로 저장할 때 1분 분량이 약 1 메가 바이트를 차지합니다. CD 원본인 경우 1분은 약 10메가 바이트가 됩니다. MP3로 저장한다면 테라 바이트 용량에는 165백시간, CD 음질 그대로 해도 16백 시간 분량이 저장됩니다. CD 음질로는 70분 정도가 담기므로 MP3로 저장하면 테라의 용량에 CD 14천장, CD 그대로 저장해도 14백장이 들어갑니다.

 

영화 200~500, CD 14 ~ 14천장. 이거 분명히 넘치고 남는 용량입니다.

 

디지털의 특성 중 하나는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사용자들은 별 뚜렷한 목적도 없이 자기 컴퓨터의 저장 용량을 멀티미디어 파일로 채웁니다. 이 과정에서 불법 복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므로 저작권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또다른 머리를 굴립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신제품이란 뭔가 더 나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억 장치들은 끝없이 용량을 키웁니다. 이 무지막지한 용량을 채우기 위해 콘텐츠 개발자들은 또 뭔가를 마구 만들어냅니다.

 

데이터가 점점 커지면서 이것을 소통시켜야 이익이 창출되므로 통신 사업자들은 또 뭔가를 부추깁니다. 통신 파이프라인의 크기는 다시금 의미 없이 점점 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세상에서 한 명의 사용자로서 분명히 어떤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느낍니다. 고삐 풀린 말 등 위에 타고 있거나, 아니면 기관사 없는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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