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무척 많다. 최근 통계를 보니 기독교 보다는 불교 신자가 더 많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내 주위에는 기독교가 더 우세다. 나는 스스로 무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자란 환경이나 사고방식을 놓고 보자면 불교에 아주 가까운 무교다. 주위의 그 많고 많은 기독교인들.. 이것도 아마 인연인가 보다.

내 주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시험'이나 '아버지가 주신 시련' 등의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물론 그들의 육체적 아버지가 아닌 그들이 모시는 그들만의 신을 뜻한다.

아버지라 부르면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에 해당하니 나 자신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둘이서 만나 둘을 낳았으니 자연의 대차대조표는 얼추 맞춰준 셈이다.
나는 가끔 내가 아버지로서 제대로 된 사람일까 궁금해한다. 특히 큰 아이에게는 너무 엄하게 대하는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큰 아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이 녀석이 어떤 잘못을 할 때면 가끔 감정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로서 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안 그러려 노력하지만 감정의 속도가 이성의 브레이크 보다는 항상 빠르다. 나이를 좀 더 먹어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이러나 저러나 약간은 모자란 아버지다. 하지만 나의 두 아이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내가 바로 그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할까?
능력 닿는 한 다 해주고 싶지만 가끔은 이성의 제동을 건다. 사탕 사주는 것 정도야 이빨이 다 썩도록 사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사탕 많이 사주는 것을 제어한다.
첫째, 이빨 썩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둘째, 사탕은 많이 먹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반대로, 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큰 아이는 요즘 천체관측에 무척 관심을 표한다. 그런데 가격을 조사해보니 웬만한 천체 망원경은 100만원 근처를 왔다갔다 한다. 지금은, 예전에 사놓은 약간 맛이 간 쌍안경 정도로 떼우고 있지만 큰 아이는 내심 더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 역시 웬만하면 제대로 된 천체 망원경을 선물로 주고 싶다. 하지만 그 금액이 나를 약간 주저하게 만든다.

내 능력이 아직 확실치 않아 더 해주고 싶은 것을 못해주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이렇게 두 아이의 아버지다. (둘째는 아직 많이 어린지라 큰 금액이 오가는 수준의 바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렇듯 그 누구보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의도된 시련을 주고 싶지는 않다.
사탕은 많이 먹으면 결국 좋지 않으니까 단속할 따름이다.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돌이 있다면 내가 얼른 가서 치워준다.
나는 결코, 아이들 걸어가는 길에 일부러 돌을 뿌려대지는 않는다.
크면 어련히 알아서 피해갈까. 미리부터 돌에 걸려 넘어지는 훈련을 일부러 시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주신 시련'으로 느껴지는 식의 표현은 정말이지 싫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훈련시킨답시고 날카로운 돌을 뿌린다거나, 멀쩡한 아이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리는 것은 아버지로서 할 행동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지탄받아야 할 행동이다.

아이 건강이 그렇게 염려된다면, 주말에 같이 손잡고 산에 가면 된다. 산에는 돌이 많다. 자연스레 돌 피하는 훈련도 되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자연스레 건강 단련이 된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83. 나의 중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운명이 그런지 나중에 고등학교도 또 그랬다. 기독교계 학교만 내리 6년을 다닌 것이다.)

그날 왜인지는 모른지만 현역 목사님이 수업을 하러 들어오셨다. 나중에 고등학교에서는 정식으로 성경수업이 있었지만 중학교 때는 그런 것은 없었다. 그날 왜 교목이 불쑥 수업을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목사님은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그리 심하게 강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주로 질문과 대답이 많았는데 유일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기억이 남는 대목이 있다. 한 친구가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이 있다면 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지금은 목사님 성함은 물론 전반적 인상착의도 까마득히 잊었지만 그 대답 동안 보여준 미소와 확신은 선명히 기억난다.

내 손에 들린게 뭐죠, 여러분?

성경책이요.

지금 눈에 잘 보이죠?

.

이걸 내가 100미터 밖에서 들고 있으면 잘 보일까요?

우리는 어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저 양반이 왜 저러나?

아마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 손에 뭔가 들고 있구나 이렇게는 보이겠죠?

.

그렇다면 내가 이 성경을 들고 10킬로미터 바깥에 있다고 합시다. 그럼 이 성경은 물론이고 나도 잘 안 보이겠죠?

.

하지만 나는 분명히 여러분과 같이 이 지구 위에 있는 거죠?

.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죠.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답니다. 우리의 눈이 그렇게 밝지는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눈이 망원경처럼 되어 하나님을 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주 부정적으로 삐딱하게 보자면 이 양반이 머리 덜 큰 중학생들 꼬시느라 즉석에서 만들어낸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분명히 감동 받았다. 왜냐면 내가 그때껏 생각 못했던 방식으로 초월자의 존재를 설명하는 한 이론을 봤기 때문이다.

 

곁에 있으나 볼 수 없는 존재.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몇몇 사이비 목사들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도 경계한다. 나와 믿는 바가 다른 신념체계로서 기독교를 바라볼 뿐이며, 가끔은 토론도 한다. 예수의 일생이 담긴 4복음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내게도 많은 감동을 준다. 4복음서 안에도 오병이어의 기적 등 다소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사소한(?) 의심이 숭고한 예수의 삶을 의심스럽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회수의 토론을 통해서, 내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많다. "그냥 믿어 보세요." 이것을 넘어서는 대답이 필요한 질문들이다.

- 예수가 독생자가 아니라면 기독교 가치체계는 무너지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내게 예수가 독생자 즉,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야만 기독교인이 되는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가 설령 사람의 아들이라 한들, 별로 달라질 바는 없을 듯 한데...

-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고, 이들로부터 카인과 아벨이 태어났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곧바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 결혼한다. 이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 그 전까지 창조에서 언급된 적이 없다.

과학적 접근법을 선호하시는 어느 목사님은 내게 이런 설명을 해주셨다. 그 시절엔 사람이 몇백년씩 살지 않았냐. 자식이라고 카인과 아벨밖에 없었겠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자식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뭐 그 목사님께 더 반론하지는 않았지만 어째 말이 좀 안 되는 설명이라고 본다. 그건 곧 남매간에 결혼해서 자손이 퍼졌다는 얘긴데 성경 전반에 흐르는 윤리적 문제와도 맞지 않는 설명이다. 노아의 방주 대목에서도 아마 동물 한 쌍 씩만 실을 것이다. 이거 윤리에 앞서 생물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 성경에 나오는 해수를 다 더하면 이 천지만물의 역사는 대략 6천년 정도가 된다고 한다. 과학적 해석으로는, 인간 기원을 제쳐놓고 쳐도, 지구 기원만 해도 40억년이 넘는다. 이 차이는?

앞서의 그 목사님은 예전 천지의 운행 주기는 달랐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편, 나의 친구 하나는 과학적 해석이라고 해서 그게 꼭 사실이겠냐, 그것 역시 단지 믿음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건 사실 평행선을 달릴 질문인 것 같다.

- (어릴 때부터 나에게 선교하던 사람들에게 항상 던졌던 질문)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데.. 그렇다면 예수의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했던 지난 역사의 다른 사람들은 다 지옥에 있나? 그런 논리로 치면 나의 수많은 조상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 죄다 지옥에 있겠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그 누구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이 외에도 많은 질문들이 있으나 자칫 말싸움으로 번지기 쉬운 내용들이므로 (예. 속삭이는 기도 대 통성 기도 등) 이만 접겠다.

2000년. 그 당시 내 주위에는 온통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 신심의 깊이를 떠나 죄다 기독교인들이었고, 죄다 나에게 교회 다닐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나도 교회엘 갔다. 내 발로 가 본 두번째 경험이다.

나는 그 전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누구를 낳고'가 적힌 페이지만 몇 번 들여다봤들 뿐이다. 알고 보니 그게 신약이었다. 제대로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느님을 믿어서? 아니다. 다만 읽어보고 싶었다.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세금장부처럼 느껴지는 몇몇 장들은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신약에 도착했고, 4복음서를 다 읽고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이구나를 알게 되었다.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불교에 더 가깝다. 성경을 읽던 당시에도 여전히 그런 마인드였다.

성경을 한참 읽던 당시다. 나는 꿈 속에서 예수를 보았다. (일반적으로 비신도들은 석가모니님이 아니라 석가모니라 호칭하므로 예수님보다는 예수가 나같은 입장의 사람이 쓰기에 맞다. 결코 비하의 뜻이 아니다. 요즘은 말꼬리가 너무 쉽고도 어이없게 잡히는 세상이라 걱정스럽지만, 호칭 관계는 명확히 해야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는 자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런 그를 나는 뒤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길게 하지만 단정하게 기르고 있었고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림에서 흔히 보는 전형적인 예수의 모습이다.

자고 있는 나를 본 나는 유체이탈을 한 것이 아니라 꿈이다. 그 당시에도 나는 내가 꿈 속에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꿈 꾸는 사람이 내가 꿈 속에 있다고 느낀 자체가 드문 경험이긴 하다.

나이가 들면서 꿈을 꿈 자체로 인식하는 능력(?)이랄까, 능글맞음이 잦아진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무서운 동물이 나를 쫓아온다. 나는 마냥 도망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분나빠진다. 저게 뭔데 날 저리도 이유없이 쫓아오지? 그러면서 나는 인식한다. 아, 이것은 꿈이야. 눈을 떠버리자. 그리고는 잠에서 깬다.

그런데 예수의 뒷모습을 보던 당시의 꿈은 처음부터 내가 꿈 속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신비함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꿈 속에서도 그리고 깨고 나서도 나 자신은 신비에 가까운 궁금함을 느꼈다. 따스함이랄까 그런 것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나의 주관 속에서 창조된 예수의 모습이 아마 가장 정확한 분석결과일 것이다. 꿈에서 예수를 본 이야기를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해줘도 예상 이상으로 심드렁했다. (사실 감탄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었다. 기대가 아니라 단지 예상.)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망상이 욕심(탐), 분노(진), 그리고 어리석음(치)이다. 살다보면 욕심과 분노를 잘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의외로 자주 직간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어리석음마저 떨친 사람은 한 번도 못봤다. 하기야 바로 바로 내가 지금 어리석은 소리를 해대고 있다. 탐진치가 깨달음의 장애이므로 탐진치가 없다면 이는 곧 깨달은 경지라고도 볼 수 있으니, 일상 생활에서 깨달은 이를 못봤다 내지 못 알아봤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니까.

 

나는 탐진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했지만 추정은 대략 해볼 수 있겠다.

 

탐 즉, 욕심은 셋 중 가장 버리기 쉽다. 이 욕심에는 식욕이니 성욕이니 등등 우리가 '욕구'라는 뜻으로 붙이는 모든 심리상태에 다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비록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나 어느 정도까지는 이성적으로 이를 제어하면서 살고 있다.

 

진 즉, 분노에 가서는 보통 사람으로서 많이 어려워진다. 내 생애 여지껏 단 한 번도 분노를 다스려본 적이 없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이를 가라앉히려는 노력은 해봤어도 분노 자체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욕심 역시 내 마음 속에서 먼저 일어나고 이를 곧바로 내가 제어하는 것이고, 분노 역시 마음 속에서 일단 일어나는 것이지만, 욕심의 경우는 시작부터 제어 그리고 소멸까지 내가 관찰자로서 위치할 수 있는 반면, 분노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비록 못 알아 차린다 한들) 내가 일단은 분노에 완전히 휩싸인 다음에야 이를 가라앉히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에 대한 다스림은 아직 좀 멀었다.

(그렇다고 내가 욕심을 잘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

 

욕심이나 분노는 적어도 내가 관찰자가 되어보려는 의식적 자리잡기 정도는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음에 대한 인식은 너무 어렵다. 욕심이나 분노에 대해서는 내가 욕심을 내고 있다 또는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다를 알 수라도 있지만 어리석음에 관한 한 나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마찬가지로 나는 그들 이상으로 어리석다. 내가 어리석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지만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어리석은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어느 고대 서양 철학자가 말했다던가. 내가 지금 아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불경 낭송 mp3를 찾았다. 여기 그 내용을 옮긴다.

그런데 원래 파일 제목은 법구경이라 되어 있지만,

내용이 법구경에서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법문인 듯.

출처를 아는 사람은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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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모든 것은 덧없고 무상하여라. 더구나 이 윤회의 세계에는 무의미한 행동을 모두 버리고,

나는 불멸의 행복을 찾아 수행의 길을 걸으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내 나이 어렸고 내가 어른 되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는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을 찾아 수행의 길을 걸으리.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나는 집을 떠나 있었고, 나 이제 돌아오니 그분 이미 세상에 없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는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을 찾아 수행의 길을 걸으리.

 

경전이 있을 때 공부할 사람 없었고, 공부할 사람 돌아오니 경전은 이미 낡고 헤졌네.

우리 함께 있었다 해도 영원을 기약하지는 못할 것.

나는 불멸의 행복을 찾아 수행의 길을 걸으리.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마치나니 육신의 정신이 떠나면 가을 들에 버려진 표주박처럼 살은 썩고

앙상한 뼈만 뒹군다. 그래도 삶 가운데 남겨 놓은 것은 오직 선악에 대한 업보 뿐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영원하리오. 우리는 나서부터 죽음 길로 뛰고 인간 쾌락을 좋아하나 허무한 순간들.

부귀영화 누렸어도 허무한 마음은 채울 수가 없어라.

 

젊었을 때는 인생이 무척 긴 것으로 생각하나, 늙은 뒤에는 살아온 젊은 날이 얼마나 짧았던가를 깨닫는다.

젊은은 두번 다시 오지 아니하며, 세월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아니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 자고 이래로 모은 재물을 지니고 저승까지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삼계에 윤회하는 고통바다의 대죄인은 보잘 것 없는 이 몸뚱이.

다만 먹고 입는 세상사에 항상 분주하여 구원을 찾지 않네.

그대여, 일체 세간사 모든 애착을 놓으라.

 

세상일 즐거워 한가롭더니, 고운 얼굴 남몰래 주름 잡혔네.

서산에 해지기를 기다리느냐, 인생이 꿈 같음을 깨달았느냐.

하룻밤 꿈 하나로 어찌 하늘에 이르리오.

 

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지 않아 허물어지고 정신이 떠나 모두 흙으로 돌아가리니.

잠깐 머무는 것, 무엇을 탐하랴.

 

오늘은 오직 한번 뿐이오, 다시는 오지 않으리.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몸이 늙고 병들어 떠나기 전에 오늘을 보람 있게 살자.

 

사람은 남의 잘잘못을 비판하는 데는 무척 총명하지만 자기 비판에 있어서는 어둡기 마련인 것.

남의 잘못은 꾸짖고 자기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마음의 죄를 지은 사람이다.

죄인은 현세에서 고통받고 내세에서도 고통받나니, 죄를 멀리 하라.

죄가 없으면 벌도 없음이요.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 것. 느끼기에 따라 길고 짧은 차이가 있나니.

즐거운 시간은 천년도 짧을 것이며, 괴로운 시간은 하루도 천년 같은 것.

그러므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것.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이 어찌 행복하다 하리오.

 

원수를 맺지 말라. 만일 원수를 맺었거든 맺은 자가 먼저 풀라.

그러면 원한은 사라지는 것. 만일 맺은 자가 먼저 풀지 않으면 영겁을 가도 맺고 또 맺혀,

실이 엉켜 풀리지 않을 것 같으리.

 

원수를 악으로 갚으면 비록 통쾌할지 모르나 상대는 나에게 원수를 맺는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면 상대에게는 은혜가 되어 그 덕이 내게로 돌아온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효도하는 자식을 두게 되고,

자신이 불효하면 불효하는 자식을 두게 된다.

그러므로, 효도하는 사람이 불효하는 자식을 둘 수는 있으나,

불효하는 사람이 효도하는 자식을 두기는 어려운 일이라.

 

사람의 성품 속에는 선과 악 두가지가 같이 들어 있다.

이 두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그를 지배하는가에 따라 선인도 될 수 있으며 악인도 될 수 있다.

 

인생을 쉽게 살아가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그 지혜를 닦으려면 배움이 필요하나니.

배움이 없는 지혜는 퍼서 없어지는 고인 물 같고, 배움이 있는 지혜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으니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천상에 갈 수 없나니.

어리석은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이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나니, 저 세상에서 복락을 누린다.

 

길손이여, 나그네여.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부처의 참모습을 찾으려 하시거든 당신의 마음 속 법개성을 보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불교는 산중 절간에 있고, 부처님은 토석으로 만든 등산불인줄로 안다.

그러나 불법은 내 주위에 있는 것. 부처는 바로 내 자신이 아닌가.

 

여름 벌레는 겨울이 있음을 모른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부처님의 도를 깨닫지 못하면 극락이 있음을 알 까닭이 없음이라.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는다.

부처님 일찍이 인과의 법칙을 말씀하시어 무명중생의 업보를 면하라 가르치셨으되,

우리들은 어찌하여 그 뜻을 모르고 방황만 하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을 볼 수 있고, 법을 들을 수 있으니 어찌 행복치 아니한가.

 

온화한 마음으로 성냄을 이기며, 착한 일로 악을 이기라.

베푸는 일로 인색함을 이기며, 진실로써 거짓을 이기라.

 

마음은 거울과 같은 것. 정법의 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면 광명은 더욱 빛나는 것.

그 광명에 중생의 어둠을 밝히리라.

 

자신의 말이 겸손하면 상대의 말도 순한 법.

마음을 온화하게 하여 서로를 존경하고 원한맺힌 마음을 버려 악한 감정을 참는다면,

미움과 원한은 다 스스로 없어져 버린다.

 

마음이 짓는 모든 것, 가고 오면서 끝이 없나니.

생각이 삿되고 치우침이 많으면 스스로 악을 부르리.

 

가난은 죄가 아니며, 불행 또한 아니다.

가난 속에서도 즐거움과 행복이 있으며, 가난이 싫거든 노력할 것이라.

노력하는 자에게 가난은 점차 멀어져 간다.

 

주위를 살펴보라. 가난하고 병들고 절망에 허덕이는 이웃이 있나니.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보태야 하나.

내 적은 성의가 그들에게 기쁨을 줄 때, 극락의 문이 한 발 가까이 있음을 알라.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내가 남을 미워하면 남도 나를 미워한다.

남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면 먼저 사랑을 베풀라.

 

언제나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라.

남에게 베푸는 보시보다 더 큰 선은 없고,

이 보시가 바로 극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세상에서 고독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나니.

나와 같은 사람이 또 하나가 있더라도 고독은 마찬가지.

그러나, 고독을 맛보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모르며,

그것을 견디지 않으면 영광이란 열매를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이 세상에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알라.

 

자신의 능력이 없이 좋은 직업만 구하려 한다면,

마치 밑천없이 사업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자신의 능력과 분수에 맞는 일을 택할 것이며,

하는 일에 만족할 줄을 알라.

 

자신을 가꾸고 다듬는 자가 바로 어진 사람이라.

도공은 그릇을 더욱 예쁘게 만들고, 목수는 나무를 깎아 다듬어 살기에 편안한 집을 세우나니.

우리도 자신을 다듬고 가꾸는 일에 열중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자.

 

작은 일이라도 선한 것이 못되면 행하기를 두려워하고,

좋은 일이라 생각되면 망설이지 말고 행하라.

 

향기없는 꽃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고운 말을 하여도 실천이 없다면 허황한 위선이 되고 말지니.

우리 다같이 내실 있는 생활로 참되게 살아가세.

인간은 지구에서 진화해온 영장류의 한 계통이라고 가정하고 보자. 여러 정황상, 외계인에 의해 심어지거나 창조된 인간이라기 보다는 털없는 원숭이의 한 종류로 인간을 보는 편이 나 개인적으로는 속이 편하다.

 

약간 서구문명적 시각이 강하게 개입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장대한 진화의 길에 나서고 드디어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국가를 만들고 등등 역사를 만들어 오는 과정에 있어 2천년 전 보다는 지금의 우리가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즉, 2천5백년 전의 석가모니 보다도 그리고 2천년 전의 예수 보다도 지금 우리의 제반 정보가 더 많다. (물론 한 인간이 가진 마음의 크기는 완전 제쳐두고 하는 소리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과연 실존했었던 역사 속 인물인가 하는 논쟁도 있지만, 이 역시 두 사람 다 분명히 이 땅에 살아 숨쉬었던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신의 아들 여부는 일단 제쳐놓자.)

 

두 위대한 스승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시비를 좀 걸고 싶어진다. 진정 깨달음의 가르침이었다면 구태여 후손들이 그거 해석하느라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사실, 신약성경을 읽어봐도 예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게만 그렇게 들리는지는 몰라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다. 석가모니의 메시지 역시 요약하면 자비가 된다.

구구절절 해석이 필요없을 듯한데, 오늘날의 많은 직업적 종교인들 즉, 승려들이나 목사들은 사랑이나 자비같은 무척 짧은 단어를 매우 심오하게 공부하고 또 미욱한 우리들 가르치느라 노심초사들 하신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을 듯 한데.

 

깨달은 스승의 메시지는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그 어떤 조작이나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 이어가면 될 듯한데 왜 종교라는 믿음체계가 생겼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이 종교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 그리고 공간을 통해 시간마다, 나라마다 엄청나게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는 과연 태국의 스님들을 좋아할까, 아니면 한국의 선승들을 좋아할까?

예수는 과연 그리스 정교의 턱수염 신부님들을 좋아할까, 아니면 한국의 초대형 교회 양복 목사님들을 좋아할까?

그도 저도 아니면 전부 다 틀렸다고 말할까, 아니면 다들 맞는 말이라고 할까?

 

종교는 나처럼 지독히도 말 들어먹지 않는 삐딱이들을 위해서 그 오랜 세월을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시대마다, 나라마다 달리하는 종교의 다양한 모습이 헷갈릴 뿐이다.

 

과학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거 완전 목수가 나무를 보지 않고 연장에만 몰두하는 꼴이다. 과학은 절대로 종교도 아니고 심지어 철학도 아니다. 과학은 그냥 과학일 뿐이다. 궁금한게 눈 앞에 있으니까 그걸 설명하려 애쓰는 활동일 뿐이다. 과학을 종교로 믿었다가는 큰일난다. 마치 개똥을 보약으로 알고 섭취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과학에 관련한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과학이 지난 역사를 통해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모 종교의 잘못된 지도자들 덕분에 과학이라는 것이 지역적으로 한참 후퇴한 적도 있다. 그래서 서구 중심 역사에서는 이를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유럽 지역이 종교의 암흑에 빠져 있는 동안 이슬람 등지에서는 꾸준히 발전이 있었다. 중국의 실용적 과학이 유럽의 과학이 재도약하는데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지구적으로 볼 때, 과학은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천동설은 잘못된 것이기에 번복된 것이고, 뉴튼의 운동역학은 우주적 규모의 현상을 제대로 다 설명하지는 못하기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것이다. 초미시 세계에서는 도깨비같은 용어를 좀 동원해야 하기에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비유하자면, 하나를 알고 나니 궁금한 것은 새롭게 10개가 더 생기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학은 진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왜 종교가 과학의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다. 그 오랜 세월 전에 깨달은 스승의 말씀이라면 지금에도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즉, 위대한 스승들의 말씀은 더 이상 가공되고 분석할 여지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걸 왜 그리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보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종교인들의 제일 안타까운 점은 과학적 사실의 예들을 스승의 교리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자기들의 믿음이 약하니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런데 마냥 느낌으로는 경제라는 것이 제로썸 게임으로 보인다.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어린이 노동자들이 선진국 고급 브랜드 제품의 첫 과정을 시작한다. 그 아이들은 그 가난한 나라의 저렴한 물가로도 죽 한 끼 겨우 사먹을 만한 돈만 받고 꿈 속에서나 만질 법한 마지막 가격의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품은 여러 과정을 거쳐 마침내 어느 먹고 사는 나라의 매장에서 아이들이 받은 품삯은 상대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팔린다. 아이들이 응당 받았어야 할 임금의 상당 부분은 자본가 몇 명의 주머니로 쏟아져 들어간다. 나누어져야 마땅한 것이 엉뚱한 목적지로 부당한 방법에 의해 몰린다. 그래서 제로썸이다. 자본가는 무언가를 창출했다고 말하겠지만 합하면 제로다. 노동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자기 지갑에 넣은 것이다. (만약 80년대에 이런 소리 했다가는 나는 이미 욕조에 머리 담그고 물 마시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 면에서는 나름대로 기분이 좋다.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에 대해서도 문득 제로썸 생각이 들었다.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들이 최소한 누려야 할 복을 천당 또는 극락으로 향한 영혼들이 죄다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자본이라는 것이 대다수 민중을 좀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당초 있지도 않은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어리석은 우리를 현혹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의사들은 비만과 고혈압과 심장마비의 공포를 퍼뜨림으로써 자기들의 지갑을 챙긴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종교상인들은 지옥의 공포를 퍼뜨림으로써 지갑을 두껍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괜히 의심이 간다. 내가 너무 의심에 가득찬 인간일까? (웰빙으로의 유혹이나 천당의 환상은 공포에 덧씌운 화장인지도 모른다.)

 

* 천당과 지옥에 대한 나의 억측은 얼치기의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 경제에 대한 제로썸 의심 역시 문외한의 엉성한 추측일 수 있다.

* 그러나! 공포 마케팅 자체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공산주의 붕괴 후 공포의 주체가 되어줘야 할 대상이 없어지자 미국은 자연재해나 질병을 공포의 대상으로 들고 나왔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상인들이 공포 자체를 마케팅에 이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인이란, 아무런 도덕적 고찰 없이 금전적 수입 자체를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경제활동 주체를 말한다.

기독교인들처럼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신약성경 어디쯤 보면 예수가 어느 제자에게 던진 이런 뜻의 구절이 있다.
"심판의 날에 너는 나를 안다고 하겠지만 나는 너를 몰라볼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자기만은 예수가 알아볼 것이라 믿겠지만, 또는 믿고 싶겠지만 글쎄...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많은 제자들이 좋은 말씀 내지는 경전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석가모니의 대답은 이랬다.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너희들은 달을 볼 생각은 않고 내 손가락만 보더라."
많은 불교인들은 자기만은 달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석가모니와 예수의 두 가지 말이 나는 정확하게 똑같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이런 말 하는 나도 그 뜻이 뭔지는 모르지만 다만 두 말이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정도 추측한다는 것이다.

왕자로 태어나 육신적 삶의 부질없음을 실컷 가르쳐주고 떠났더니 인간들은 금새 까먹었다. 그래서 보기가 너무 답답하여 이번에는 반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메시지를 주었는데 그것마저 죽자마자 다 까먹더라... 나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 또는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가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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